매일신문

출향 경제인과 차한잔-김광수 서울전자통신(주) 사장

우리나라에서 제조업을 하는 사람은 애국자라고 한다. 값비싼 노동력, 철벽같은 규제 등 어려움이 많아서다. 대구에서 제조업을 하다가 사업은 접으면서 공장 땅을 큰 차익을 남기고 판 모 기업가는 제조업 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울전자통신(주) 김광수(金光洙·44) 사장은 제조업 예찬론자다. 밑천없이 큰 돈을 벌려면 제조업만한 게 없다는 거다.

◆처절한 공부=선친을 일찍 여읜 김 사장에게 공부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점촌에서 자라 공부를 제법했던 그는 대구공고 전기과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먹고 자며 잡일을 했다. 덕분에 학도호국단비 6천 원만 내고 학교를 다녔다. 당시 일기에는 배가 고팠던 그에게 도시락을 싸준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는 얘기가 적혀 있다.

경북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해서도 형편은 같았다. 처음 입학금만 내고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공부했다. 틈틈이 일당 5천 원인 교통정리 아르바이트도 했다.

돈을 원없이 벌어야겠다, 제조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 때 가진 듯하다.

◆4천만 원이 밑천=김 사장은 LG전자에서 5년간 근무했다. 입사 동기 가운데 대리로 가장 먼저 진급하는 등 잘 나갔다. 하지만 사업가 기질 때문인지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역업을 잠시 했다. 쟁이에게 맞지 않았다.

다시 취직한 영국계 제조회사에서 경북대 4년 선배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바로 남광희 KH바텍 사장이다. "아이템이 너무 좋더라고요. 남 선배를 꼬드겨 직접 제조하기로 했죠. 500만 원은 집에서 얻고, 500만 원은 은행에서 빌렸습니다. 남 선배가 집을 담보로 3천만 원을 마련했고요. 4천만 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중소기업 창업자금 3억8천800만 원을 지원받아 구미에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직원 3명. 자전거부터 미사일까지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철저히 준비했다. 이 덕분인지 1994년 창업 첫해에 6억9천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 후 10년간 KH바텍의 성장은 눈부셨다. 외환위기 때 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매출액이 두 배씩 늘었다. 9억6천만 원, 22억 원, 52억 원, 96억 원, 190억 원, 500억 원, 960억 원….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2002년 코스닥에 등록했다. 직원이 670명으로 늘었고 중소 제조업 가운데 시가총액이 한때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나흘 동안 1분도 안 잤다=삼성전자 납품은 즐거움이자 고통이었다. 핸드폰을 열면 안테나가 자동으로 나오는 부품을 개발한 것이 납품의 결정적 계기였다.

물량이 밀릴 때 납기를 맞추기 위해 나흘간 단 1분도 자지 않은 적도 있다. 그는 "독이 바짝 오르니 안 먹고 안 자도 버틸 수 있더라"며 살짝 웃었다.

삼성전자의 주요 거래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기술력과 끊임없는 연구개발에 있었던 듯하다.

책에는 다이캐스팅으로 만들 수 있는 최소 두께가 0.6mm로 되어 있으나 KH바텍은 0.35mm까지 만들었다. 한계기술이다.

KH바텍은 또 한달에 90~100개의 신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괴력에 가깝다.

김 사장은 "삼성전자가 다양한 제품을 빨리 시장에 내놓아 승부하는 전략을 쓸 것으로 봤습니다. 당시 우리 회사는 한달에 5~6개의 제품밖에 개발하지 못했어요. 삼성이 우리를 기다려줄 리 만무하므로 삼성보다 앞서 개발해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발 설비를 대폭 확충하고 우리와 거래하는 작은 업체에도 개발실을 만들도록 독려했습니다. 협력회사와 함께 노력하니 두달반이 걸리던 개발기간이 12일로 단축되기도 했어요."

◆홀로서기=그는 2년 전 10년 동업을 접었다. 지분을 처분해 100억 원을 세금으로 내고 남은 돈으로 법정관리 중이던 서울전자통신(주)을 인수했다.

사들인 회사를 예전처럼 운영할 것 같으면 아예 사지를 않았다. 구조조정하고 불합리한 납품체제를 전면 개편했다. 주요 부품은 내재화(회사가 직접 생산)했다. 체제가 잡히자 새로 반도체 사업을 추가했다. 기계기술 응용제품으로 성공한 그가 반도체에서도 성공하는 신화를 만들고 싶은 것. 아직 투자하는 단계지만 최근 새로운 거래선을 확보하는 등 희망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고의 신용평가회사인 한국신용평가정보(주)의 지분 50%도 최근 확보했다. 서울전자통신과 한국신용평가의 자회사를 합하면 10여 개가 넘는 작은 그룹이다. 그 외 그가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기업도 10여 개 되는 눈치다.

사업이 참 쉬운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데에는 그만의 비결이 있다. 정도경영, 공평경영. 그는 특히 공평경영에 방점을 찍는다. "기업이 이윤을 내면 사장이나 직원이나 골고루 갈라 먹어야지요. 오너만을 위한 법인, 특정 세력만을 위한 기업이 오래가겠습니까?"

또 있다. 절대 개인용도로 법인 돈을 쓰지 않는다. 직원 가운데 친인척이 없다. 정실 인사가 회사 돈 횡령보다 더 나쁘다고 그는 생각한다. 건강한 회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과 가족에게도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엄청난 부자지만 집도 절도 없다. 분당 아파트도 전세다. 부동산 살 돈이 있으면 재조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그에게 주변에서는 "당신 젊어서 그렇지 나이들면 남들처럼 추해질 것"이라고 한단다.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사장이 되고 싶고, 건강한 법인을 만드는 것이 사업가의 책무라고 믿는 그가 과연 추해질까?

적은 나이도 아닌데 이제 가족에겐 조금 너그러워져야 않겠느냐는 기자의 권유에 그는 "그러잖아도 성격 좋은 아내가 다음에는 집을 사자고 조른다"면서 "한 번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고향을 떠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불편해도 자금을 대구 금융기관에 맡겨 운용하고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대구에 괜찮은 제조회사를 하나 만들 뜻도 갖고 있다. 그의 '아름다운'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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