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이 이성을 추월한지 오래다. 원본보다는 패러디, 심지어 패스티시(텅빈 패러디, 공허한 복사물)가 보편적으로 실천된 결과, 실재(實在)는 사라지고 이미지, 환영(幻影), 감각적인 구경거리, 쓸모없는 허구가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중심에 리모콘이 자리잡고 있다. 리모콘은 지극히 후기 자본주의적 특성을 지닌다. 정보소비자들로 하여금 정보소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소비구조에 끊임없이 연루되게 만든다.
두서너 개의 지상파 방송채널만이 존재하던 80년대에 리모콘은 몸을 움직여 채널을 바꾸는 수고를 덜어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십 개의 채널, 심지어 수백 개의 채널을 마주하고 있는 오늘날, 리모콘이 없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리모콘이 없다면 TV앞에 앉아 채널변경을 담당하는 그 누군가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면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리모콘의 간편성·즉시성·편재성(偏在性)으로 인하여 정보소비의 동시성·유연성·편리성이 증대된 대신 정보소비의 우발성·비지속성·오락성(유희성) 또한 늘어났다.
리모콘은 개별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할 뿐더러 주체적인 소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풍부해진 채널은 오히려 리모콘을 통해 가난해지며, 늘어난 정보의 양은 리모콘을 통해 왜소해지며, 정보의 다원성은 리모콘을 통해 단순화되며, 절대적 정보소비시간은 늘어났다지만 단위채널·내용에 대한 소비시간은 오히려 짧아지게 되었으며, 문화의 다양성은 리모콘에 의해 오히려 방해받으며, 극복 가능해 보이던 공간적 한계도 리모콘을 통해 더 고립되게 되었다. 결국 리모콘을 통한 우리의 삶은 늘어난 채널과 정보량에 의해 식민화(植民化)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리모콘은 천박한 대중문화의 양산에 기여하게 되었다. 수용자들은 순간적인 화면이동, 지핑(Zipping) 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영상에 내재된 내연적 의미를 숙고하지 않는다. 정보생산자들도 얼마나 깊이있게 소비했느냐 보다는 얼마나 많이 자기정보를 소비했느냐에 관심 갖는다. 그리고 정보의 역사성·윤리성·사회적 영향력보다는 상업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리모콘의 마력(魔力)에 의한 우리 삶의 식민화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정보소비 방법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정보소비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지 않는가? 마치 발떨음이 심한 청소년들처럼 우리는 정보소비의 발떨음 증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자성해 봐야 한다.
오창우(계명대 미디어영상대학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