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뒤바뀐 '팔불출'

필자는 지난 1995년 8월부터 3년간 영국 런던에서 재정경제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 이 때 선진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세계경제 흐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HSBC·바클레이즈·스탠더드 차터드 등과 같은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은 이미 세계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경쟁심화와 그로 인한 경기침체를 감지하고 전세계 영업망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었다. 3년 이상 적자 점포는 폐쇄하고 1년 이상 적자 점포는 규모를 절반으로 줄였으며, 자국내 영업점도 통폐합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작업이 한창 추진되고 있었다.

이처럼 세계 금융시장이 한창 구조조정을 시작하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금융기관들은 런던시장에 지점이나 사무소 하나 개설하지 못하면 CEO가 마치 팔불출이나 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너나할 것 없이 앞 다투어 개점 테이프를 끊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렇게 허겁지겁 개설된 지점이나 현지법인은 제대로 일도 한번 못해보고 거의 다 폐쇄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세계 금융시장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흐름과 동떨어진 경영을 하여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선진국이나 주요 경제주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대비하는지 잘 살펴보고 그에 맞게 신속히 대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한발 앞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 대가로 외환위기를 겪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떠나는 등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않았던가?

요즘 필자는 모 은행의 매각을 둘러싸고 금융기관들이 몸집키우기 경쟁 움직임을 보이는데 대해 조심스러운 우려를 갖게 된다. 금융권의 최근 환경을 보면 방카슈랑스를 필두로 투자은행업무, 자산운용업무 등 영역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인수·합병 등 시장선점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번 대형 금융기관 매각과 관련해 무리한 인수 프리미엄을 얹어주고서라도 몸집을 늘려야 한다는 시각이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당장 업계에서 자산규모 선두권으로 올라서거나 확고부동한 선두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산 규모의 선두가 과연 경쟁력의 선두로 직결되는 것일까? 혹여라도 지불하는 비용이 너무 과하거나 내실있는 운영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시너지 극대화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준비되지 않은 채 인수경쟁에 몰두하다보면 지난날 외형불리기에 치중하다 고초를 겪은 재벌기업의 발자취를 답습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란 걱정이 든다.

IMF이후 금융권을 포함한 우리 기업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명제하에 수익성과 내실경영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해왔다. 기업 구조조정의 목표는 최종적으로 핵심역량을 강화해 경쟁력있는 영속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지금의 한국경제는 완만하지만 안정적인 성장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한편 세계적인 은행들의 경우 동업종간 합병보다 이업종간 합병을 통해 구조적인 금융선진화를 도모한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시티그룹이 살로먼·스미스바니를 인수해 투자은행부문의 경쟁력 강화와 시너지 효과를 도모했고, 유럽을 중심으로 가계금융과 기업금융을 취급하던 도이치방크가 미국의 뱅커스 트러스트를 인수, 투자은행업무와 자산관리부문의 역량을 강화한 바 있다.

이번 매머드급 금융기관 매각문제를 접하면서 단지 외국투기자본의 엄청난 매각차익에 대한 시기어린 시각이 아니라 내실과 합리적 경영이라는 시각에서 좀더 냉정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동업종간 합병을 통한 대형화만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환기해보자는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 소위 '대세'의 중요성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많은 경쟁자들의 움직임을 외면하며 '마이 웨이'만을 고집할 때 동업계로부터 팔불출로 치부되는 심정이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IMF 이전에 당시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모르고 팔불출을 면하기 위해 앞다퉈 런던지점 개점 테이프를 끊었던 사람들이 진짜 팔불출이었음이 훗날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던가. 금융기관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세'를 '정답'이라고 예단하지 않고 긴 안목에서 미래를 냉철하게 분석, 판단해 대응하는 혜안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배영식 한국기업데이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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