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막내 아들(김성훈·34·대구 수성구 파동)이 머물고 있는 병실에 들릅니다. 손이라고 꼭 잡아주고 싶지만 유리문 밖에서 지켜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병실 안과 밖에 비치된 전화기를 들고서야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균실인 탓에 이따금 들어갈 때도 온몸에 소독약을 뿌린 뒤에야 근처에 갈 수 있지요.
성훈이의 병명은 고환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긴 했지만 난데없이 암이라니요. 어렵사리 이만큼 키웠는데…. 지난 2003년 처음 발병한 뒤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했는데 지난 해 다시 몹쓸 병이 찾아왔어요. 정신이 아득해지더군요. 그 병은 가난 만큼 떨치기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우리 집은 한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30여 년 전 건축현장에서 일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지요. 남편은 건물 5층에서 일하다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나이 서른에 홀로 된 제게 남은 것은 아이들뿐.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몸으로 때우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막일 등 일할 곳이 있다면 몸을 사리지 않고 했지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중구 남산동 오토바이 골목 주변에 세를 얻어 식당 문을 열었습니다. 오전 6시부터 반찬을 장만하고 밥을 지었지요. 음식 만들랴, 식사 배달하랴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짬이 나면 근처 시장에 장을 보러가야 했고요. 새벽 2시가 넘어 식당 문을 닫을 때쯤엔 몸이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식당이 재개발로 헐린 뒤엔 파출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어요. 다행히 아이들은 큰 말썽 없이 잘 자라줬습니다. 힘들어도 성훈이만은 대학 공부를 시키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되더군요.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 때문인지 늘 일할 궁리만 할 뿐 공부는 관심 밖이었지요.
군 복무를 마친 성훈이는 어느 날 돈을 벌겠다며 훌쩍 집을 나서더니 소식이 끊겼습니다. 알고 보니 중국음식점에서 음식배달을 하며 생활했더군요. 젊은 혈기 때문이었을까요. 손에 쥔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지난 2001년 다시 제 품에 왔을 때 남아있는 돈이라곤 없었어요. 제가 꾸짖자 고개를 들지 못하더군요.
병원을 찾기 전까지 성훈이는 다시 철가방을 잡았습니다. 배달일을 하면서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울 생각이었지요. 월급을 받으면 꼬박꼬박 제 손에 쥐어줬어요. 마음을 다잡은 아들이 대견스러웠습니다. 활발한 성격에 성실한 태도가 음식점 사장님 눈에 들었던 걸까요. 2003년 고환암 수술을 받은 뒤 퇴원했을 때도 다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성훈이 병원비를 대느라 전셋집도 처분, 월세로 옮겨야 했지만 땀 흘려 일하는 성훈이를 보면 마음 한결 가벼웠는데…. 지난해 무더운 여름, 음식점에서 막 일을 마친 성훈이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병이 재발한 것이지요. 그동안 많이 아팠을 텐데 진통제를 먹으며 참았던 모양입니다. 돈이 아까워 미련하게 버텼던 겁니다.
먼저 간 남편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요? 남편에게 조금만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어차피 살 만큼 살았으니까 데려가도 괜찮지만 막내는 아직 더 살아야 한다고.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오랜 고생 끝에 관절염과 당뇨병을 얻은 윤정영(61·여) 씨. 그에게 남은 희망이라곤 아들 성훈 씨 뿐이다. "부모는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지요? 성훈이가 통 못 먹어 걱정입니다. 다행히 성훈이 몸 속 암세포가 많이 사라졌대요. 하지만 병원비(400여만 원)는 무슨 수로 감당할지 모르겠네요. 제 형제들도 모두 막일로 생계를 꾸리는 처지니…."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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