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보수적인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성을 '친구와 적(敵)'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진리가 되었다. 우리 인간은 무엇에 대한 지지보다는 무엇에 대한 반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인기 연예인의 오빠부대는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지지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라이벌 연예인들에 대한 미움을 키울 때에 '우리 오빠'에 대한 열광의 농도가 짙어진다. 싸워야할 적이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건 그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위대한 정치 지도자에겐 싸워야 할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건 존경하는 지도자의 이름과 존경의 이유를 물어보시라. 강력한 적을 물리친 공적이 빠지는 법은 없다. 인간세상에서 적이 없을 순 없지만, 그 적의 실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건 별개의 문제다. 유능한 지도자일수록 적의 위협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학자들은 그런 정치술을 가리켜 '적 만들기'(enemy-making)라는 딱지를 붙였다.
미국 역사에서 국가적 적이 없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초강대국이 된 이후에도 그랬다. 적이 없으면 대통령은 적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래야 통치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내는 건 아니었다. 적의 위협 정도를 과장하는 뻥튀기 수법이 동원되었다.
'적 만들기'를 꼭 나쁘게만 볼 건 아니다. 선의로 해석하자면, 국민의 관심과 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과장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지배자가 아닌 저항자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상대편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의도적인 전략·전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적 만들기'엔 위험의 요소가 다분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위험한 건 '적 만들기'가 아예 체질화된 경우다. 즉, 이해득실을 따져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에도 과거의 타성 때문에 습관적으로 적을 과대평가하면서 전투적 자세를 고집한다는 뜻이다.
그런 '적 만들기'에도 분명 그럴 만한 근거가 있겠지만, 그로 인한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자기성찰과 교정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과오마저 적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대중이 납득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적 만들기'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과도한 '적 만들기'에 몰두하느라 최소한의 염치까지 잃어버리면 방종을 일삼다 사고가 터져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한국 정치는 그 어떤 나라의 정치보다 더 '적 만들기' 게임이 지배한 정치였다. 그만큼 내부 갈등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기성찰과 교정은 거의 씨가 말라 버렸다. 무감각과 몰염치가 판을 쳤다. 대중에게 주어진 건 오직 선거에서의 응징 뿐이었다. 한국 정치와 선거는 "누가 누가 잘 하나"의 게임이 아니라 "누가 누가 못 하나"의 게임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은 개혁을 해보겠다는 좋은 뜻으로 전투적 자세를 취했지만 자기 성찰과 교정에 너무 소홀했다. 그것도 비극이지만, 더 큰 비극은 아직 노정권에게 기회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노정권의 적이 더욱 나쁜 면을 보여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기대가 남아있기 때문에 노정권은 최후의 자기성찰과 교정마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양쪽 모두 "누가 누가 못 하나"의 게임을 벌이는 악순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나 할까. 여기에 열성 지지자들까지 가세해 자기편 잘하게끔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상대편 때리는 일에만 일로매진하니, 정치권 탓만 하기도 어렵게 됐다. 역사 탓을 해야 하나? 늘 잘하는 쪽을 지지하기 위해 표를 던지기보다는 못하는 쪽을 응징하기 위해 표를 던져야 하는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팔자가 기구하다. '적 만들기'라는 오래된 게임의 법칙을 내던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경선 일정 완주한 이철우 경북도지사, '국가 지도자급' 존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