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캠프는 고생하는 체험입니다. 말 안들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벌 서야 합니다."
송종대(39) 의성 교촌농촌체험학교 사무국장의 한마디에 느긋하던 참가자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니, 이게 뭐야? 소풍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엄포'가 효험을 발휘한다. '마을 순례'를 나서는 참가자들의 대열이 정연하다 못해 진지하기까지하다. 이튿날 과제인 '이장님 숙제'를 위해서 구석구석을 눈여겨봐두라는 송 국장의 말에 박상욱(40·대구 수성구 시지동) 씨는 메모까지 해가며 열심이다. "이렇게 적어두지 않으면 뭘 봤는지 잘 모르잖아요. 아이들한테도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줄 겁니다."
향교 앞 하마비(下馬碑), 흙벽집, 떡방앗간, 비료창고, 트랙터, 멍석, 디딜방아, 절구, 맷돌, 초갓집…. 어른들에게는 '추억'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너무 센 뒷산의 양기를 막기 위해 마을에 저수지를 팠다', '향교를 지키던 사람이 귀신을 봤다'는 등등 재미난 이야기에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른다.
다시 체험학교 운동장. 참가자들이 두 팀으로 나눠 게임에 열중이다. 이른바 '농촌올림픽'. 리어카 릴레이를 한 아빠들은 가족의 명예를 걸고 달리고 엄마들은-조금은 민망스러운-밭매기용 안전뱅이 의자를 엉덩이에 찬 채 신나게 뛴다. 아이들 역시 제 덩치만큼이나 큰 나락자루를 안고 마당을 누비고 줄다리기로 모두가 하나가 된다. 이지훈(12·대구 달서구 장기동) 군은 "리어카를 처음 봤는데 너무 재미있다"며 동생들을 태운 채 땅거미가 내려앉은 운동장을 숨이 차도록 돈다.
이어진 프로그램은 창작 송편빚기대회. 한 쪽에서는 달콤한 송편소를 송편 대신 입 속에 털어넣기 바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박장대소가 터진다. 1등은 '물고기가 있는 연못'을 출품한 박채은(8·여·대구 수성구 시지동)이네 가족.
냉이 된장국으로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고 뚝딱 한 그릇씩 해치운 뒤에는 즐거운 가족 레크리에이션과 표고버섯 농사체험이 기다린다. 처음 해보는 '도둑을 잡아라' '자리 바꾸기'게임이었지만 모두들 몸을 사리지 않는 통에 교실이 떠들썩하다. 술래가 된 권영숙(55·대구 북구 구암동) 씨는 벌칙으로 노래와 춤솜씨를 뽐내고 어색해하던 참가자들은 이제 내 식구 네 식구가 따로 없다.
'위이~잉 위이~잉' 귀청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전기 드릴과 톱소리도 열기를 식힐 수는 없다. 이창수(56) 이장의 시범을 지켜보는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거 하나면 올 가을 반찬 걱정 안해도 됩니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나눠받은 참나무에 종균을 끼워넣기 바쁘다. 강영자(38·여·대구 동구 신기동) 씨는 버섯을 많이 먹게 참나무에 구멍을 더 뚫어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이단희(38·여·대구 달서구 도원동) 씨는 맛있는 된장찌개를 기대하라고 가족들에게 약속한다.
밤이 깊어지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불놀이가 시작된다. 군고구마가 익어가는 냄새에 모두들 군침을 삼키고 아이들의 얼굴은 온통 숯검댕이가 됐다. "오늘 밤에는 이불에 지도 그리는 놈 꽤 되겠네."
전날보다 훨씬 쌀쌀해진 일요일 아침.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하지만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도 모두들 아랑곳하지 않는다. 술래잡기 놀이와 축구 한 게임으로 땀을 흘린 뒤 먹은 닭개장은 말 그대로 꿀맛.
이어서 열린 '이장님 숙제'는 이번 체험 프로그램의 백미. 솔방울 주워오기, 나락·고추 얻어오기·마을 어르신께 인사 드리고 성함 여쭤보기·방앗간 당번 이름 알아오기·향교 역사 알아오기 등 문제지를 받아든 표정들이 영 무겁다.
하지만 어쩌랴. 뿔뿔이 흩어져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리고 방앗간도 찾아가고 들판에서 거미를 잡는다고 난리다. "아이들 숙제를 어른들이 대신 해주면 벌 서야 합니다." 송 국장의 따끔한 지적에 부모들은 낯을 들지 못한다.
마지막 체험프로그램 '짚공예체험' 시간에는 모두들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여 서로들 놀라는 눈치다. 대상은 '강아지를 끌고 가는 소년'을 만든 김찬형(8·대구 동구 신기동) 군 가족이 차지했고 '핸드백을 든 엄마와 모자를 쓴 아빠'를 만든 유승민(10·대구 수성구 중동) 가족이 준우승. 새끼줄로 남자와 여자를 묶은 김미래(11·대구 달서구 이곡동)네 가족의 '사랑의 포로'는 '꿈보다 해몽' 상을 수상했지만 '만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아빠가 혼나는 모습'이 아니냐는 야유(?)를 받기도.
아쉬움 속에 마을 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대구로 돌아오는 길. 안계미곡종합처리장에서 쌀을 가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모두들 우리 쌀 사랑을 다짐한다. "수입 쌀이 싸다면 사먹을까 생각했는데 마음을 바꿨어요. 우리 쌀을 우리가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가 돌아갈 농촌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요."
이상헌기자 daavi@msnet.co.kr 의성·이희대기자 hd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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