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12)'대구학생사건'과 김성칠

일제하 단일 학생결사사건으로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은 1928년 11월에 있은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이었다. 대구의 고등경찰 9명이 넉 달 간 전속으로 매달려, 11월 6일부터 대구시내의 남자 중학생을 대상으로, 전후 105명을 구속한 후, 12월 이 중 결사간부 26명을 검찰에 송치한 것이 사건의 개요이다. 대구사범학교의 현준혁(玄俊赫)교사가 지도한 '사회과학연구사건'보다 1년 앞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대구의 남자 중학생 학부모들 중 대여섯 집에 한 집 꼴로 경찰의 폭압적인 가택수색을 받아야만 했다. 그만큼 무진(戊辰)년도 저무는 세모의 대구거리는 이 일로 전에 없이 술렁거렸다.

일경에 의해 밝혀진 결사단체는 '신우(新友)', '혁우(革友)', '적우(赤友)', '우리동맹' 등 7개 단체였다. 이 단체들의 지도강사로는 박광세(朴光世), 장적우(張赤宇)등 사회주의 의식을 지닌 청년들이었다. 이들로부터 독립사상과 사회주의교육을 받고 해방 후 이름을 떨친 학생은 대구고보의 윤장혁, 상무상, 김일식, 황보선, 김성칠 등과, 대구중학의 조은석, 대구농중의 권태호, 대구상업의 장원수들이었다. 특히 고보생들은 교내 언론집회의 자유, 조선역사과목의 신설, 조선어학습시간의 연장, 불량일인교원의 경질 등 일제의 식민지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요구조건을 내걸며 동맹휴학을 하기도 했다.

구속된 학생들과 지도강사들은 1년에서 3년 전후의 감옥살이를 했는데, 이들이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을 때인 1930년 6월에 바로 장진홍의사의 옥중자결사건이 발생했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수감학생들은 일제히 감방 벽을 부수며, 분사한 장의사를 살려내라고 농성한데 이어 단식에 돌입했다. 맹휴와 결사에 못지않은 비장한 옥중투쟁이었다. 그러자 일경은 윤장혁(尹章赫) 등 주동자 수명을 '건조물파괴'라는 죄명을 덧씌워, 징역 8개월의 가형(加刑)처벌을 하는 이중의 악랄함도 보였다.

'비밀결사단체'라 했지만 일제고등경찰이 자신들의 수사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과장한 바도 없지 않았다. 실제는 신진사상에 대한 지적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독서동아리'모임에 가까웠다. 사회(공산)주의학습은 당시의 지식청년들로선 흔히 있는 신사상연구풍조의 하나였다. 일본에서도 사회주의서적과 사상에 접해보지 않으면 지각이 모자라는 학생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따라서 학문적 관심이 일차적이어서, 일인 관헌들 가운데도 성장기 청년들의 이런 연구풍조를 대범하게 보아주는 인물도 없지 않았다.

1년 넘게 구속되어 있던 대구고보 2년생인 나이 어린 김성칠(金聖七. 뒷날 사학가)에게 뜻밖의 '기소유예처분'을 내리면서 담당검사가 했다는 말 역시 그런 뜻에서 새겨볼 만 했다. "15세미만의 사상범을 만드는 것은 대일본제국의 명예에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15세미만인 덕에 퇴학만을 당한 김성칠은 일본의 국경일만 가까우면 매번 가위눌림을 당했다고 한다. 잦은 예비검속에 심신이 움츠려들어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히 도일하여 경직된 사회과학지식만이 아닌 더 많고 다양한 지식을 흡수함으로써, 해방공간에서 선배들이 즐겨 찼던 마르크시즘의 강물을 뛰어넘어, 폭넓은 안목의 사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6.25 때 서울에 갇힌 그는 좌우에 편향됨이 없이 '붉은 서울'의 실상을 낱낱이 일기장에 담았다. 신변의 위험을 각오하면서도 선혈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천성의 역사기록자였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고향인 영천에서 어이없게도 괴한에게 피격되어 원사(寃死)하고 만다. 아무리 '미친 세월'탓이었다지만 생전에 '조선역사', '주해 용비어천가'와 '열하일기','대지', '초당'등의 번역을 해 온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던 사학자이며 번역가였던 서울대 교수 김성칠로썬 무엇보다 38세의 한창나이가 두고두고 아까웠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