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58개띠의 세대론

이 병술년 새해를 양력으로 개봉하기 바쁘게 한국 언론들은 앞다투어 '58년 개띠'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제목도 다양하고 요란했다. 왜 58년 개띠인가, 산전수전 다 겪은 58년 개띠, 찬밥신세 '낀 세대'서 사회적 주류로, 잡초와 같은 생명력을 지닌 58개띠 사람들, 왜 58년 개띠가 유명해진 건가 등등.

산술로는 1958년에서 12년을 더하든 빼든 위아래 합쳐 8단계는 더 형성될 텐데, 나는 58개띠의 일원으로서 은근히 부아가 돋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이나 '잡초와 같은'이란 말이 수식이든 헌사든 어찌 우리의 특별한 몫이란 말인가.

가당찮고 어림없는 소리다.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운신마저 어렵게 생존해 계신 우리 어버이들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그런 한편, 솔직히 미지근한 쾌감도 맛보게 되었다. 딱히 이거다 하고 자랑할 건더기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도 어쨌든 세상의 상식이 주목해줄 만한 고달픈 풍파의 곡절을 안고 태어난 듯한 착각을 겪었던 것이다.

우리의 숱한 동갑내기들 가운데 출판동네에서 이름도 내고 밥도 좀 챙기는 두셋은 '58개띠들의 이야기'를 기획, 새해의 개봉에 맞춰 단행본으로 찍어냈다. 영특한 개보다는 약삭빠른 고양이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 그들의 노고는 문화부 기자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끌었다. 언제부터인가 58개띠란 말이 회자된 덕택이었다.

향토예비군을 지나 민방위마저 제대한 58개띠를 용케도 거의 소대병력(필자 27명)으로 동원한 그 책은 1970년대 우울한 혼돈의 색채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난, 반공, 군사훈련, 유신, 데모….

어떤 친구는 '첫 뺑뺑이 입학'을 들춰내며 그걸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이며 동갑내기인 박지만의 탓으로만 알았다 했고, 또 누구는 어디서 그 주인공과 만난 김에 확인해 봤더니 펄쩍 뛰더라는 일화를 털어놓았다. 나도 한 꼭지를 맡았다. 뭘 쓰나 며칠 궁리하다 결국 어린 시절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궁핍의 기억을 풀어냈다.

그런데 우리의 회고담은 결코 58개띠의 고유한 추억이 아니었다. 내 유년의 과거가 그때 영일만 갯마을에서 성장한 모든 초등학생의 일상이었던 것처럼, 서울내기든 호남내기든 충청도내기든 감자바위든 그때 우리는 위아래 몇 살 차이 선후배와 어울려 대동소이한 풍경 속으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씁쓸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일이다. 다만 나는 58개띠로서 그때 함께 같은 풍경 속으로 걷고 있었던 선후배들과 이제라도 공유할 만한 '세대론'을 생각한다. 효행의 소중한 덕목인 생물학적 세대론은 아니다. 시대적 지평에 대한 인식의 폭넓은 공감대로서의 세대론을 말한다.

일제, 분단, 좌우격돌, 전쟁, 폐허, 빈곤, 독재를 거치며 대다수가 1980년까지 자연 연령으로 60세 넘게 살아야 했던 우리 어버이세대는 인생의 황금기를 산업화와 민주화에 고투를 바쳤다. 경제와 민주주의가 동시대의 역사무대에 공존하지 못했던 혹독한 시대, 얼마나 그게 힘겨웠으면 20세기말에 이르러서야 김대중 정권이 '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란 국정 슬로건을 내걸었다.

우리 어버이세대는 역사에 '위대한 세대'로 기록되어 마땅하다. 5천년 대물림해온 절대빈곤과 억압체제를 극복하여 경제와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이 자랑스런 과거 위에서 현재 우리의 십대와 이십대는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그들의 현란한 발랄함과 가벼움에는 58개띠조차 따라잡기 어려운 상상력이 작동되고 있다. 바야흐로 그들이 우리 역사에 최초로 '빈곤과 압제라는 체제적 거대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세대'로서 당당히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어버이세대는 국가적 차원의 엄청나게 곤혹스런 유산도 남겼다. 남북분단, 정치적 지역감정, 부패구조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58개띠를 비롯해 사회의 주류대오를 형성한 우리 세대의 책임론이 제출된다.

우리 세대의 동반자는, 어떤 경우에는 저 친구들은 시대적 무뇌아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 해방의 세대이다. 이러한 염려를 내놓으면 노파심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벽에서 발견된 '요새 애들 버릇없다'라는 낙서처럼 여길지 모르는 집단과 더불어 같은 풍경 속으로 걸어가기 위해, 먼저 우리 세대는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통찰하고 있어야 한다.

이대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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