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하 "조폭 만나며 나의 비열함을 봤다"

21일 군산 경암동의 한 폐공장. 그냥 흙먼지가 아닌 기름때가 찌든 먼지가 자욱한 그곳에서 마스크를 쓴 채 영화 '비열한 거리'(제작 싸이더스FNH)의 막바지 촬영 중인 유하 감독을 만났다.

93년 자신의 동명 시집을 영화화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후 9년 만에 선보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단박에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4년 '터프가이' 권상우를 '소심남'으로 설정해 폭력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린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후 학원물의 텍스트로 여겨진다.

유 감독이 8개월 동안 촬영에 집중해온 '비열한 거리'는 '꽃미남' 조인성을 삼류 조직폭력배의 행동대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왠지 비릿해 보이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 역시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본성을 드러낸다.

"웬일로 빨리 끝냈다"는 스태프들의 말처럼 이례적으로 빨리 현장을 정리한 유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가 인간의 폭력성의 탄생 과정을 그렸다면 '비열한 거리'는 그 폭력성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보여주려 한다"고 영화를 설명했다.

"'폭력성'에 대한 3부작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 영화가 잘돼야 3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웃는 유 감독은 "만약 만들어진다면 40대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이 폭력성에서 얼마나 헤어나올 수 없는지를 그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열한 거리'에서 삼류 조폭의 '넘버2'인 김병두의 인생은 별 볼일 없다. 병든 어머니와 두 동생, 무겁게 짓누르는 가족까지 둔 가장이다. 그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지만 돌아오는 건 비극뿐.

우선 권상우에 이어 '조인성 카드'라는 또 한번 의외의 캐스팅을 한 배경을 물었다. 드라마 속 꽃미남의 이미지를 어떻게 투박한 조폭의 이미지로 변화시킬 생각을 했는지.

"권상우 때도 말들이 많았다. 뭐하러 터프가이를 소심남으로 만들어놓느냐고. 조인성도 그런 말 많이 들었다. 난 배우에 대해 선입견이 없다. 솔직히 조인성이 출연한 작품을 본 건 영화 '클래식'이 유일하다.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 얼마 전 스태프들과 케이블TV에서 방영되는 '남남북녀'를 봤는데, '아마 캐스팅 전 이 영화를 봤다면 안했을 것'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난 배우의 눈을 본다. 눈에 선함과 비열함이 공존하고 있다. 조인성과의 작업이 무척 즐겁다. 그는 아직 완성이 안돼 있고, 완성을 향해가는 배우다. 내가 채우는 만큼 채워지고,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해내 만족스럽다. 단 하나 주문한 것은 너무 '조폭스러움'에 강박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서툰 건 용서돼도 진심이 없는 연기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그는 "배우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게 재미있다. 꽃미남 이미지를 조폭으로 만들 때 쾌감이 있다"며 감독만이 느끼는 '재미'를 말했다.

영화의 95%에 등장하는 병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한 축을 병두의 친구인 영화감독 민호(남궁민 분)가 채운다. 병두의 이야기를 하는데 영화감독을 내세운 이유에 대해 "특별한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 감독은 "조폭 대 영화감독의 구도가 아니라 30살에 생을 마치는 김병두의 비루한 삶을 다루는 한 장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조직폭력배를 많이, 자주 만났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다 보니 조폭을 다룬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유 감독은 "그들을 만나면서 내가 참 비열하다고 느꼈다"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들을 만나러 나가기 전 어느 순간 '아, 오늘은 나가면 에피소드로 쓸 만한 재미있는 '대박'거리 하나 건져야지'하는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조폭이 등장한다고 해서 굳이 조폭영화, 느와르 영화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비극을 향한다는 점에서는 느와르로 말할 수 있다"는 그는 "특별히 참고한 작품이 있다기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Goodfellas'를 좋아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어 '비열한 거리', 그리고 가능하다면 3부까지 만들 정도로 '폭력성'에 집착하는 듯 보인다.

유 감독은 "고등학교부터 경험해서인지 인간의 '조폭성', '집단적 폭력성'에 관심이 많았다. 그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으며, 유신 교육의 트라우마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또 하나 화두로 던진 건 '식구(食口)'의 의미. 병두의 위태로운 삶에는 가족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는 "병두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식구는 '같이 밥 먹는 입구멍'이다.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식구는 이기적이며 비열함과 비루함에 기반한다. 이 시대에 한번쯤 반추해볼 만한 화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한국 관객을 위해 재미있고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스토리를 짜보자는 욕심을 가졌다는 유하 감독. 성공한 시인이자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아직도 잊을 만하면 시집 '바람 부는 날에는…'의 인세가 들어와 큰 도움이 된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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