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24일 유엔군 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명령했다. 중국에 휴전 제의를 고려하고 있던 대통령 트루먼의 정책 방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당시에 이미 두 사람의 견해는 심각할 정도로 달랐다. 정치적으로도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립관계는 잦아들 것 같았지만 때마침 터진 6·25전쟁으로 맥아더는 정치적으로 다시 부상할 수 있는 호기를 잡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맥아더는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됐다. 그러던 맥아더가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은 중공군의 개입 때문이었다. 38선 부근에서 대치가 장기화하자 트루먼이 휴전을 모색했던 것.
이에 맥아더는 공산국가 중국과의 한판 승부를 위한 확전을 제의했다. 만주에 26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의 군대를 중국 본토로 상륙시키자고 했던 것. 3차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만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면서 두사람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날의 북진 명령도 이런 상황에서 내려졌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맥아더는 4월 11일 해임됐지만 전쟁은 그 뒤로 2년이나 더 지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1882년 미국시인 헨리 롱펠로 사망 ▲1962년 천주교 노기남 신부, 한국 최초의 대주교에 임명.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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