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석각성의 현장을 찾아서'-②부석사 다시 보기 다섯 번

부석사(浮石寺)는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사과 밭 사이로 난 약간 경사진 길로 가다가 절에 들어선다. 천왕문(天王門), 고루(鼓樓), 안양문(安養門)을 거쳐 무량수전(無量壽殿)으로 올라가면서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감탄한다. 감식안 있고 글을 잘 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그리는 경연대회를 벌였지만, 말이 실상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가서 보면 안다. 부석사를 보는 이 방법에 관해서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 방법은 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절을 창건한 의상(義湘) 스님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선묘(善妙)라고 하는 아리따운 소녀가 마음을 주었다. 의상이 떠나는 것을 알고 의복 선물을 가지고 바닷가로 갔더니 배가 멀어지고 있어, 선묘는 몸을 바다에 던져 커다란 용이 되어 의상이 무사히 신라에 이를 수 있게 인도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방해하는 무리가 있어, 선묘가 용의 모습을 하고 바위를 들어 올려 제압했다. 뜬 돌 부석(浮石)이 남아 있어 절 이름의 유래가 된다. 선묘정(善妙井)이라는 우물이 있어 용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선묘각(善妙閣)에다 선묘의 모습을 그려 모셔놓았다.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는 중국에서 만들어졌음인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기록되어 전한다. 일본에서 그 사연을 두루마리 그림에다 그린 것을 국보로 삼고 있다.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하는 동아시아 공동의 전승 중심에 부석사가 있다. 소녀와 스님, 사랑과 초탈, 바다와 산, 용신 신앙과 불교의 만남을 오묘하게 엮어낸 상상이 조형물의 아름다움과 맞닿아 예술 창작 의욕을 계속 일깨워준다.

부석사를 다시 보는 방법은 문헌에 전하는 내력과 견주는 것이다. 의상은 당나라 고승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668년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진리를 탐구한 요체를 간추려 보여주었다. 670년에 귀국하고 676년에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설법을 하니 영험이 많았다고 했다.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등 다른 여러 절에서도 가르침을 베풀었으나, 부석사가 으뜸이다.

670년에서 676년 사이 어느 해에 소백산 추동(錐洞)이라고 하는 곳에서 풀을 엮어 막사를 짓고 무리 3천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했다. 추동이 지금 어딘지 확인되지 않는다. 소재지가 소백산이라고도 하고 태백산이라고도 했다. 부석사가 자리 잡을 말할 때에도 두 산을 다 들었다. 추동 또는 그 가까운 곳에 부석사를 세웠다고 생각된다. 지통(智通)이라는 사람은 종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출가하자 이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보현보살에게서 계를 받아 마음이 훤하게 트였다. 고명한 스님 낭지(朗智)를 찾아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보현보살에게서 계를 받았으면 자기 스승이라고 했다. 의상이 추동에서 화엄경에 관해 설법하는 것을 듣고 '추동기'(錐洞記)를 저술했다. 당나라 법장(法藏)의 저술이라면서 대장경에 들어 있는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이 '추동기'임이 밝혀졌다.

진정(眞定)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하는 미천한 인물이었다. 의상의 강의를 들으러 가고자 했으나 생계 대책이 없는 어머니를 홀로 버려둘 수 없어 고민이었다. 어머니가 남아 있는 곡식을 다 털어 밥을 싸주면서 자기는 생각하지 말고 떠나가라고 간곡하게 권유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상 문하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는 절차를 거치고 강의를 다 듣자, 죽은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하늘에 환생했다고 했다.

부석사를 다시 보는 넷째 방법도 있다. 의상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했는가? 무엇을 말한다고 3천명이나 모여들어 풀로 지은 막사에서 90일 동안이나 고생했는가? 생계 대책이 없는 늙은 홀어머니를 버리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찾아내야 한다.

'화엄일승법계도'의 본문과 설명이 있어 무엇을 말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당나라에서 지어가지고 온 그 저작을 강의 내용으로 삼았을 것이다. '화엄경문답'에서는 문답 방식으로 진행한 강의를 정리해놓았다. 지엄이 개척한 화엄학을 이어받아 신라에 전한 내용이다.

의상의 강의가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절실하게 필요한 사상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치를 밝히면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리니 놀라웠다. 사고수준을 대폭 높여 고차원한 질서관을 이룩하고, 사회불안을 해소하는 방안을 갖추었다. 3천명이나 되는 청중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정의 어머니가 하늘에 환생했다고 한 것 같은 영험을 바라고, 의상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는 못해도 참고 견딘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화엄경문답'에서 주고받은 말에도 고도의 지식을 요구하지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을 잘못 하면 더 어렵게 만들 염려가 있으므로 원문을 들어야 한다. 우리말로 주고받은 내용을 기록해 한문으로 간추린 것이 지금 볼 수 있는 원문이다. 그러나 한 자 한 자 소중하므로 직접 보아야 한다.

'기법무유처 기단유어문'(其法無留處 豈但有語聞·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데, 어찌 말을 듣는 데만 있겠는가?)고 하고, '문처영유어문 부득문지처중 영유어불문이'(聞處令有於聞 不得聞之處中 令有於不聞耳·듣는 곳에서는 들음이 있게 하고, 들을 수 없는 곳에서는 듣지 않음이 있게 한다)고 했다. 말이란 이런 것이다. 말로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없다. 말이 치우쳐져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또한 치우쳐져 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어서 '어중무잔 법무진'(語中無殘 法無盡·말은 남겨둔 것이 없으나, 법은 다함이 없다)이라고 하고, '고영증자지이'(故令證者知耳·그러므로 증험한 사람이라야 알도록 한다)라고 했다.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다함이 없음을, 모든 것은 말의 치우침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말로 일러줄 수 없으므로 스스로 증험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이 진실인가는 언술이 아닌 증험의 소관이다. 말을 듣고 알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증험해야 한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들으려고 갔다가 들은 것 없이 되돌아가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준 것이 의상이 한 일이다.

여기까지 이르면 부석사를 다 본 것이 아니다. 다섯 번째 방법을 찾아 다시 보아야 한다. 스스로 증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의문을 풀려면 첫째 방법으로 본 것을 다시 보는 것이 좋다. 육안으로 본 것에다 심안으로 본 것을 보태고,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을 합치자. 부석사를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의상이 말한 바를 내가 본 것을 가지고 시비하자.

올라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리를 굽혔다 펴고 몸을 위로 옮기면서 눈으로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체험보다 더 진실한 것은 없다. 하품(下品)에서 상품(上品)까지 향상의 단계가 있다고 설명하는 말은 헛된 간섭이다. 올라서는 것만큼 시야가 더 열리게 전각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는데 더 물을 것이 어디 있나.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곧게 나아가면 굽어야 한다. 의상이 그런 형상을 나타내는 시를 만들고 절을 지었다. 안양문을 거쳐 무량수전으로 올라갈 때에는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야 한다. 길을 찾았다고 해서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안 된다. 그냥 가기만 하는 길은 담과 다를 바 없다. 방향을 바꾸는 비약이 있어야 담이 다시 길이 된다. 방향을 바꾸는 데 규칙이 있다고 미리 헤아린다면 비약일 수 없다. 비약 예상은 비약 거부만큼 해롭다.

무량수전 안의 부처는 화엄의 이치를 구현한 비로자나불이리라는 예상을 깨고 아미타불이다. 협시보살 없이 홀로 오른쪽으로 돌아앉아 동쪽을 향하고 있다. 고매한 이치는 모르는 저 아래 뭇 중생의 의지하는 대상을 거기서 만나 높은 것이 낮은 것임을 알도록 일깨워준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부석사 오르기는 끝나지 않는다. 절이 끝난 곳에 산이 있고, 하늘이 있다. 온 우주를 향해 길이 열려 있다. 올라가는 것이 끝이 아니다.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아래로는 마을과 길이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갖가지 사연이 있다.

부석사는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생각할 수는 없다고 염려해 중간 지점에 관측소를 하나 만들어놓고 몇 마디 어설픈 해설을 한 방해꾼이 의상이라고 하면 말이 지나친가? 자유롭게 오르내리려면 의상을 잊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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