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6 정시 서울대 면접·구술 문제

▨ 문제

한 민족이나 한 사회 혹은 사회 집단이 공통으로 겪은 역사적 경험은 그것을 직접 체험한 개개인의 생애를 넘어 집단적으로 보존, 기억되는데 이를 집단 기억이라고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대량 학살에 대한 유대인의 기억은 집단 기억의 좋은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한 민족이나 한 사회의 집단 기억은 그 구성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양자의 관계를 설명해 보시오.

▨ 해결의 실마리 찾기

▲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 구분하기

이 질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민족이나 ~ 좋은 사례입니다.' (이하 A)에서는 '집단 기억'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 설명해 보시오.' (이하 B)에서는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를 제공하는 제시문이 포함된 구술 문제와는 달리 교수와의 질문-답변이라는 대화 형식 문제의 답변은 이 짧은 질문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짧은 질문에서 어떤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먼저 집단 기억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A 부분을 분석해 보자.

A 부분은 다시 '집단 기억'에 대한 정의 부분(한 민족이나~기억이라고 합니다.)과 사례 부분(제2차 세계 대전~사례입니다.)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집단 기억이란 '집단의 역사적 경험이 보존, 기억'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집단 기억이란 용어는 우리에게 대단히 낯설다. 왜일까? 우리가 배운 역사의 공식은 '국가의 역사=국사'이다. 즉, 우리에게 역사는 곧 국사이며, 국사란 국가라는 집단의 기억할 만한 과거의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미 십수 년 동안 국사라는 과목을 배운 우리에게 '집단 기억'은 대단히 익숙할 수밖에 없는데도, '집단 기억'이란 용어로 표현이 되자 낯선 것이다. 한편, '집단 기억'이 있다면 '개인의 기억'도 있을 텐데, 우리는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기억 혹은 국사와 대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을 낯설게 여긴다. 다시 말해, 국사라는 국가 집단의 역사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개인 존재의 역사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동안 개인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서 '집단 기억'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는 '집단 기억'에 대응하는 '개인의 기억'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해 내라는 요구가 담겨 있으며, '역사=집단 기억'이라는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질문의 핵심은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의 관계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핵심은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이라는 대립항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의 차이점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밑그림을 그려 볼 필요가 있다.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의 차이는 무엇일까?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 차이점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보자. 질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한 민족이나 한 사회 혹은 사회 집단이 공통으로 겪은 역사적 경험은 그것을 직접 체험한 개개인의 생애를 넘어 집단적으로 보존, 기억되는데 이를 집단 기억이라고 합니다."

밑줄 친 부분을 눈여겨본다면, 개인 기억과 집단 기억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지속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억이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불변하는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건 나에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속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억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를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유 역시 나에게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억 능력은 나란 개체가 소멸하는 순간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집단 기억'은 '개인 기억'과 달리 한 개체의 생애를 넘어 보존되고 기억된다는 속성이 있다. 즉, 개인의 기억은 '한 생애'를 단위로 그 종지부를 찍지만, 집단의 기억은 '생애'의 단위를 넘어서 장기적으로 지속된다. '집단 기억'이 세대의 한계를 뛰어 넘어 전승되는 수단은 우리가 국사라는 과목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자 기록을 통해서일 수도 있고,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의 방식이었던 이야기(말)를 통해서일 수도 있다.

▲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의 관계 설정하기

앞선 A부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답변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확보했다. 이제 질문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렇다면 ①한 민족이나 한 사회의 집단 기억은 그 구성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②구체적인 예를 들어 양자의 관계를 설명해 보시오."

질문이 요구하고 있는 답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집단 기억이 그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예를 통해 집단 기억과 그 구성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구성원을 '개인'으로 바꾸어 읽는다면, 질문의 핵심은 결국 집단 기억과 개인의 관계를 묻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집단 기억은 그 구성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기서 개인이 아니라 구성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구성원이란 용어는 한 개체의 정체성을 집단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파악한다는 뜻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체는 늘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게 마련인데, 집단의 예로는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집단인 민족, 국가를 들 수도 있고, 직장이나 학교를 들 수도 있으며, 가족을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민족이나 사회 등의 훨씬 인위적인 집단을 예로 들고 있으므로 혈연 집단인 가족은 제외하는 것이 좋다.

민족, 국가, 직장, 학교 등의 집단의 기억이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②를 참고한다면 여기서 그 영향이란 집단과 구성원 간의 관계 양상을 말한다. 예를 든다면 구성원들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것도 영향일 수 있고, 일부 구성원에게 소외감을 유발시키는 것도 영향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집단 기억과 구성원의 관계가 반드시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며, 구성원들에 의해 집단 기억은 수정되고 변모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집단 기억은 그 형성 시기부터 다소 과장되게 마련이나, 전승 과정에서 구성원에 의해 수정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결국, 전승의 주체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 질문에 답하기

▲ 구성원을 통합시키는 집단 기억

한 민족이나 한 사회의 집단 기억은 그 구성원에게 먼저 집단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켜 그 집단에 대한 역할과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동기를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구성원'은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전에 이미 한 개체로서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란 한 개체를 형성하는 무수한 정체성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개체는 살아가는 동안 늘 어느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부분적인 정체성'이 그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와 같이 집단이란 대개 개체가 적응되고 받아들여야 할, 개인의 자유를 늘 제한하는 그 무엇이다. 영원하지는 않아도 개인의 생애보다 훨씬 긴 수명을 가진다. 또한, 개체가 속해 있는 학교 집단들은 대부분 교육 제도가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개체보다 오래 존속할 가능성이 크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해도 개체보다 사태를 수습하고 이겨 낼 수 있는 시스템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개체는 늘 집단과의 불화를 겪으면서도 집단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집단 기억'이다.

이처럼 집단 기억이란 한 개체가 그 집단에 대해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한 대량 학살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들은 그러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국가 건설 운동에 나서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유대인의 나라를 세웠다. 즉, 집단과 개체가 모두 말살될 수 있었다는 강렬한 기억이 집단의 생존을 위한 국가 건설에 개체가 헌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로마의 지배 이후 늘 자신의 삶터에서 쫓겨나 유럽의 전역을 전전해야 했던 유대인들에게 집단의 기억을 간직하고 전수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다른 기억의 억압

하지만 집단 기억에 구성원을 통합하는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집단 기억은 그 집단과 다른 기억을 지니고 있는 구성원의 의식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자. 1948년에 발생한 이른바 제주도 4·3 사건은 일부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는 당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사건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정책적으로 국가의 '합법적인 선거를 방해한 반란이나 폭도들의 만행,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었다. 국가의 집단 기억에 의해 국가의 성립을 반대하는 반국가 활동의 거점으로 찍힌 제주도민들에게 이 집단 기억은 거부하고 싶지만 국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기억이었다. 이러한 소외의 기억은 제주도민들의 심성을 왜곡시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흐름을 낳기도 했다. 결국, 군사 정권이 끝난 후 제주도 4?3 사건은 '국가에 의한 과잉 진압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란 집단 기억으로 다시 복원될 수 있었다.

▨ 예시 답변

-교수: 질문에 답해 보게.

-학생: 저는 집단 기억이 그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구성원들이 집단에 대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더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는 집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집단도 자기만의 고유한 기억을 만들어 나가면서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집단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저는 축구 경기를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국가 대표 간의 대항 경기에는 반드시 해당 국가의 국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국가를 연주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때 대표 선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마 대개는 자신이 국가를 대표하고 있으며, 팀의 승리가 곧 국가의 승리요 국민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집단 기억은 과거 국가 대표들의 자랑스런 승리의 역사이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패배의 역사일 것입니다. 그러한 집단 기억을 되새기면, 국가 대표의 승리의 역사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할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교수: 그렇게 보면 집단 기억이 구성원들을 통합한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학생: 그렇다고 집단 기억이 전적으로 긍정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왜냐 하면, 집단 기억이 구성원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유발하여 타 집단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군인들은 자랑스런 일본의 팽창의 역사에 기여하기 위해, 즉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던지며 집단을 위했지만,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건 간지 침략 행위였을 뿐입니다.

또한, 집단 기억은 그 집단은 그 집단과 다른 기억을 지닌 일부 구성원들을 배제하는 역할도 합니다. 제주도 4?3 사건이 국가 폭력에 의한 제주도민들의 희생 사건으로 규정되기 전까지 제주도민들은 폭도나 반란군, 혹은 그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지니며 살아갔습니다. 이 때의 집단 기억은 그 집단과 다른 기억을 지닌 구성원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교수: 잘 말했네. 그렇다면 반대로 구성원들이 집단 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 보게.

-학생: 저는 구성원들이 집단 기억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집단 기억이란 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구성원들은 집단 기억을 만들고 변형시키고 그것을 후대에 전해 주는 적극적인 주체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질 당시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론에서 보도한 대로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의 선동으로 일어난 사태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일을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습니다. 즉, 기억을 위한 싸움을 벌인 것입니다. 결국, 10여 년이 지나 광주 사태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피해를 당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집단 기억을 뒤바꾼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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