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둘째형 이반은 막내 알료사에게 악(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마(惡魔)는 존재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악마를 창조했으며 인간 자신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악의 화신인 악마를 실제로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역사를 통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온 바와 같이, 우리는 악의 존재를 전율할 지경으로 흔하게 마주쳐 왔다. 말하자면,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악을 창조했음에 틀림없는 걸까. 더구나 우리 안에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살아 움직인다. 이렇게 본다면, 악이나 악마는 우리 삶 가까이에 상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나아가 '악마는 신(神)의 대리인인가, 적인가'라는 물음까지 나오게 되는 사실 역시 무리만은 아닌 듯싶다. 심지어 보는 시각에 따라, 이 세상은 악의 소굴이며, 우리는 그 소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악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얘기도 성립된다. 그래서 마냥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며, '자비를 베푸소서'다.
미국의 역사신학자 제프리 버튼 러셀은 '악(또는 악마)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 결함을 가진 비실체'이며 '부정의 부정이고, 사랑의 빛으로 파멸되는 무의미'라고 했다. 20여 년에 걸쳐 악의 문제에 천착, 그 연구 결과로 펴낸 4부작 '악의 역사'에서의 이 같은 결론은 각별히 마음을 잡아끈다.
'악'이나 악의 원리를 인격화한 '악마'를 파악하는 일은 인류의 오랜 숙제였다. 여전히 끊임없는 물음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이 일은 '신의 실체·본질 규명하기'이자 '현실세계에서의 신으로 상징되는 희망의 논거 찾기'라는 점에서 물음이 멈춰지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러셀은 데블·사탄·루시퍼·메피스토펠레스로 구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인류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상됐던 악과 악마의 모습을 좇아 밝히면서 해박한 분석을 가한 뒤 '부정은 긍정으로, 악은 선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다.
그런 것 같다. 우리는 갈수록 온갖 악과 악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사랑과 도덕의 실종이 빚어내는 아수라장에 놓여 허덕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과 '자비', '도덕성' 회복을 강조해 왔고, 지금도 그런 소리가 작아지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형국이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요즘 세태는 실로 어지럽고 어둡다. 도덕이 무너지고 악이 창궐하는가 하면, 어느 한 구석 성한 데가 없다는 말도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아래'도 예외는 아니나 '위'가 더 그렇다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요즘 다시 새삼스럽게 공자(孔子)가 뜨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세기말이던 지난 1999년, 우리나라에서는 공자와 '논어(論語)'가 수명을 다한 것처럼 몰아붙여졌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지음)는 그 극단적인 예였다. '외환위기'라는 처참한 상황과 맞물리기는 했지만, '온고(溫故)를 밀어내고 '지신(知新)'만 지향하는 바람이 거세졌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그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무려 서른 종이 넘는 '논어' 번역본과 해설서가 쏟아졌다. 종래의 성리학적 권위를 벗어나 새 시각으로 역주(譯註)에서 경영학 이론을 뽑아내는 책까지 다양한 해석들이 시도됐다. 특히 성인(聖人)을 벤치마킹하고 인간의 길을 배우는 빛깔을 띤 점은 주목된다. 7년 전의 '공자 사망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견해들이 적잖아 그간 세상과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방증으로 읽히게도 한다.
이 같은 바람은 우리의 전통적인 미덕을 찾으려는 마음이 다시 고개 들고, 위계질서와 윤리?도덕이 무너진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반작용과 자성(自省)의 소산이라 한다면 아전인수식 발상이기만 할는지…. 러셀이 간파했듯이, 악은 '결함을 가진 비실체, 부정의 부정, 사랑의 빛으로 파멸되는 무의미'라면, 그 자리에 긍정과 선(善), 사랑과 도덕이 새롭게 살아나고, 온고지신의 미덕이 봄바람만 같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태수 논설위원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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