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희망편지-모의고사 유감

지난 토요일, 신문을 읽다가 모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골수암으로 시력을 잃은 한 중국 소녀의 마지막 희망을 들어주기 위해 지린성 창춘 시민 2천여 명이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으로 만들었다는 기사였다. '중국을 울린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가끔은 진실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을 가슴으로 느끼게 했다.

"'마지막 잎새' 이야기가 심금을 울리는 건 사람들이 그만큼 진실에서 멀어지고, 거짓말에 익숙해졌다는 의미"라는 오래 전 국어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럴 것이다. 약속은 깨지라고 만든 것이라는 말에 화내지 않고, 진실은 자고 나면 거짓이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세태이지 않은가.

문득 전날 씁쓸했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대구의 수십 개 고교가 3학년생들에게 24일에 모의고사를 치른다고 했다가 바로 전날 취소했다는 것이다. 이유야 충분하다. 이날 모의고사는 교육부가 금지하는 사설기관 주관이고, 지난 9일 서울시 교육청에서 주관한 모의고사를 이미 치렀으니, 보름 사이에 두 번이나 정규 수업을 뒤흔들 이유가 없는 셈이다. 오히려 굳이 모의고사를 치르려 한 의도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사설기관 모의고사를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한 약속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깨버리고, 그러면서 어떠한 해명도 없고 미안함도 느끼지 않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경위를 취재하느라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설기관 모의고사의 필요성에 대한 찬반 논란만 있었을 뿐 학생들과의 약속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벌써 몇 년째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는데 새삼스레 뭘 그러냐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웃기는 일이다. 모의고사를 친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등교했는데 "오늘 안 친다."는 한 마디만 듣고 정규 수업을 들으라니. 학교야 몇 년째라고 하지만 이제 막 수험생이 된 학생들로선 처음 겪는 황당한 노릇이다. 거짓말을 가르치는 학교를 어찌 봐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학생들이 이 같은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마음조차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학교의 거짓말에 익숙해지고, 학교가 하는 약속의 실현 여부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면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절망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있지도 않은 라디오 뉴스라며 끝내 희망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그 거짓말이 현실로 입증됐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현실이 되지 못하는 학교의 거짓말을 들으며, 그러한 상황조차 당연시하며, 가슴 속에 불신의 두께만 높여가는 우리 학생들은 과연 거짓말의 미학이란 말을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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