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알루미늄 도시락

그 시절엔 배 속에 거지라도 하나 들어있었는지 첫 시간 수업 마치면서부터 아이들은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후딱 한 두 숟가락씩 먹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야리꾸리한 반찬 냄새에 선생님들은 코를 틀어막고 소리부터 지르시곤 했다. "이놈들아, 창문 좀 열어라 창문".

드디어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점심시간! 도시락 뚜껑 여는 소리, 밥친구를 부르는 소리, 웃음소리...수업시간에 목 비틀린 닭처럼 꼬박대던 아이들도 이때만큼은 눈이 반짝거린다.

알루미늄 도시락통의 반찬들은 서로가 엇비슷했다. 짭짤한 콩자반과 '쑤루메'라 부르던 오징어채 무침, 멸치볶음,오뎅볶음, 김치... 어쩌다 다진 소고기를 넣은 고추장 볶이에 계란 프라이 한 장 밥 위에 척 걸쳐져 있으면 요샛말로 도시락짱.

삼삼오오 둘러앉아 왁자지껄한 그룹일수록 도시락 수준이 괜찮았다. 반면 뚜껑을 조금씩 열어가며 혼자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도시락은 대개 거므레한 보리밥, 푸르딩딩한 김치 등 초라했다. 점심때면 몰래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도시락 한 통 다 까먹고도 매점에서 크림빵을 주전부리로 사먹는 동안 꼬르륵 거리는 배를 수돗물로 달래야 했던 아이들이었다.

도시락의 백미는 역시 고추장. 밥 위에 고추장을 듬뿍 놓고 뚜껑을 덮은채 아래위로 흔들면 고추장 비빔밥이 됐다. 콧등에 송글거리는 땀,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고추장 도시락을 먹던 아이들.

하지만 연탄 아궁이에 허리 구브려 도시락용 콩을 볶던 엄마들의 모습도, 그 콩 한 줌 얻어먹으려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있던 꼬마 동생도,김치국물이 번져있던 도시락 보자기도,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자랑스럽게 내놓던 아빠들의 모습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 됐다.

한 대학 식당에 '추억의 도시락'이 점심 메뉴로 등장,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한다. 밥 위에 계란 프라이, 소시지,마늘쫑과 새우볶음,고추장 등이 얹혀져 있다고. 학생들은 부모세대처럼 도시락을 신나게 흔들어 대고, 나이 지긋한 교수들도 추억 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선다고.

그러고보니 도시락이 있던 그 시절과 급식과 회식이 넘쳐나는 요즘은 서로간 정(情)의 두께도 달라진 것 같다. 이 봄날, '엄마'의 손맛이 봄 햇살처럼 담겨져 있던 도시락이 문득 그리워진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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