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봄이다. 마을 입구에서 활짝 반기는 산수유꽃, 앵두꽃, 목련꽃, 그리고 개나리. 국도 28호선을 따라 달려온 버스 안도 웃음꽃으로 넘쳐난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그 집은 아들만 둘이네, 우린 딸만 둘인데." "넌 이름이 뭐니, 몇 학년이야?"
'이장님 댁', '영미네', '호승이네'…. 이름도 정겨운 민박집에 짐을 풀어놓자마자 모두들 감자밭으로 달려간다. 모두들 호미 한 자루씩 쥐고 어색한 몸짓으로 쪼그려 앉아 씨감자를 심는다.
"더 깊이 파야 됩니다. 얕게 심으면 안 돼요." 조그만 텃밭을 가꾼다는 박재학(65·대구 수성구 만촌3동) 씨는 같이 온 손자 경(10), 건(9)이를 돕다 말고 처음 농사일을 해보는 젊은 부부들에게 훈수를 둔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주민 이규덕(73) 씨는 "체험객들이 심은 감자는 싹이 안 나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농사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면 그게 다 좋은 것"이라며 미소짓는다.
봄이라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의 바람은 아직 차갑다. 활터에 부는 먼지바람은 절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바람 좀 분다고 이 재미있는 활쏘기를 안할쏘냐.
이우근(47) 세심전통테마마을 사무장의 안내를 받아 활시위를 당겨보는 표정들이 자못 진지하다. 하지만 '골드'를 쏘겠다는 생각과 달리 화살은 채 얼마 날아가지도 않는다. 전통 국궁인 '연무궁'은 아이들도 시위를 당길 수 있을 만큼 가벼운데도.
굴렁쇠 굴리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굴렁쇠가 굴러가는지 아이들이 굴러가는지 헷갈린다. 그래도 가족대항전인지라 모두들 나름대로 명예를 걸고 열심히들 달린다.
간만에 힘(?)을 쓴 뒤라 민박집에서 먹는 저녁식사는 꿀맛이다. 이정덕(69) 홍옥화(61) 씨의 '영미네' 집에 머문 박태미(38·구미시 구평동) 씨는 "민들레뿌리로 만든 김치와 남방나뭇잎 김치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너무 맛있다."라며 급하게 먹더니 결국 체했다며 소화제를 찾는다.
마을회관에서 열린 회재 이언적 선생의 18세손인 이정웅 씨의 예절 강의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진지하다. 김용범(40·대구 북구 복현동) 씨는 "종갓집 종손에게 절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것 같다."라며 흡족한 표정.
이씨의 부인, 종부 김춘란(51) 씨가 지도한 탁본교실도 인기 만점. 회재 선생의 시를 새긴 목판에 물을 뿌리고 말리고 먹물을 찍고 관인을 찍고…. 정성을 다한 탁본에는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듯하다.
천연기념물 115호인 중국 주엽나무가 지키고 서 있는 독락당(보물 413호) 마당에서 열린 삼겹살 파티에는 어른아이 너나 할 것 없이 장사진이다. 누가 보면 저녁 굶었다고들 하겠다. 도시민들과 주민들은 어느새 소주 한잔을 주고받으며 '식구'가 됐다. 산촌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지만 모두들 민박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오늘 꼭 자야 돼?"
이튿날 아침. 전날보다 훨씬 포근하다. 아이들은 이지대(61) 이장을 따라 산으로 진달래를 따러 가고 어른들은 독락당에 다시 모여 전통혼례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떤다. 신부로 뽑히는 행운을 잡은 김영교(38·대구 달서구 대곡동) 씨는 '웃으면 딸 낳는다.'는 하객들의 핀잔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짓는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듯 신랑 성재환 씨도 "딸만 둘 있는데 이번에는 꼭 아들 낳겠다."고 너스레.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하객으로 와주신 마을 어르신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은 끝나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 신랑을 매달아놓고 발바닥을 때릴 차례다. 전날 '신랑신부뽑기 노래자랑대회'에서 나훈아의 '사랑'을 멋지게 불렀지만 아쉽게도 탈락한 황진규(36·구미시 구평동) 씨는 감정(?)을 가득 실어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새신랑은 연신 '장모님'을 찾으며 비명을 지른다.
즐거운 잔치가 끝난 뒤에는 푸짐한 음식이 빠질 리 없는 법. 아이들이 따온 진달래꽃잎으로 화전을 부치고 고구마와 밤이 숯불에 맛있게 익어간다. 넉넉한 잔치국수가 준비되는 동안 마당 한쪽에서는 제기차기, 널뛰기, 지게지기 놀이가 이어진다.
아쉽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꼭 다시 올게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 마을의 명예주민들이시잖아요."
추사 김정희, 한석봉 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는 옥산서원(사적 154호)을 들렀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참가자들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가득하다. '가족들과 함께한 오늘, 잊지 않고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