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가정은 정원과도 같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요며칠새 꽤나 심사가 어지러웠음직 하다.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지옥과 천국을 오르내렸으니 말이다. 한 지방 방송국 라디오 진행자가 라이스 장관을 두고 "대단한 검둥이(A big coon)"라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미 잡지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뽑을만큼 파워풀한 그녀에게 더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손이야 발이야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진행자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반면 라이스 장관을 대통령감으로 언급해온 로라 부시 여사는 최근 CNN 토크쇼에서도 "뛰어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껏 추켜세웠다.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두 말의 공통점은 어쨌든 라이스 장관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이런 와중에서 라이스 장관은 "나를 강하게 만든 것은 인종차별의 경험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다. 인종차별이 유난했던 앨라배마출신인 그녀는 고등학교때까지는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의 왕따 신세였다. 그런 그녀가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국무장관이 됐고, 나아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감으로 오르내리게 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그 기적은 딸을 '인간'답게 키우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 부모들의 헌신과 사랑 덕분이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흔히'식욕'과 '성욕'을 꼽는다. 그러나 가족사회학자들 중에는 이보다 더 앞서 기본 욕구로 '안정 욕구'를 주장하기도 한다. 신체적·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나서야 식욕도 성욕도 생긴다는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 안정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환경은 다름아닌 '가정'이다. 라이스가(家)는 비록 차별받는 흑인가정이었지만 딸이 마음껏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오늘의 콘돌리자 라이스를 탄생시킨 자양분이 됐다.

요사이 우리 사회는 집 안이건 바깥이건 도무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범죄·가정폭력·입시지옥 공포 등 '불안'이라는 가스로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의 고무풍선 같다.

최근 잇따르는 성범죄는 전국민이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 병리 현상이다. 최근 한길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의 85%가 자신이 성범죄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19세 미만 아들을 둔 가정의 64.5%도 성추행·성폭행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고 응답했다. 성별·연령·장소·시간을 가리지 않는 막가파식 성범죄의 횡행이 전국민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특히 연쇄 성범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모성(母性) 결핍'이다. 연쇄·흉악·아동 대상 성범죄자 212명에 대한 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의 자료에서도 이중 41%가 부모 이혼에 따른 모성 결핍성 범죄자로 나타났다. 또 부모와 함께 살더라도 가정폭력·알콜중독·도박중독 등으로 자녀에게 무관심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70% 가량이 모성 결핍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모의 사랑과 격려 속에서 행복한 성장기를 보내지 못하고 오히려 애정 결핍과 폭력의 공포 속에서 자란 자녀들 중 범죄의 수렁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너무 준비없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키운다. 남편과 아내가 될 준비도,부모가 될 준비도 하지 않은채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된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아기 울음 소리를 듣기 힘든 시대다. 잘못된 자녀 양육을 뼈저리게 느끼고 개선할 기회도 별로 없다. 이제라도 '부부'·'부모'가 어떤 존재인지,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준비하고 교육하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최근 미국 정부는 올해부터 2010년까지 모두 7억5천만 달러(약 7천500억원)의 예산을 투입, 결혼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다.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가운데 마약·범죄·빈곤 등 각종 사회 문제의 해법을 가정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가정은 마치 정원과도 같다.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돌보면 향기로운 꽃과 싱그러운 나무,새들의 노래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뜰이 되지만 가꾸는 손길이 사라지면 이내 잡풀로 뒤덮이고 마르고 시들어 황폐해져 버린다.

더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가정(家庭)'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 사회적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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