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거의 광풍(狂風) 수준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온통 쓰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서론·본론·결론이 어떻고, 두괄식·미괄식이 어떻고, 문장의 형태는 어떻고 하는 공부투성이입니다. 쓰기 위해 읽는 글이나 책은 딱딱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전(古典)을 읽으라고 하지만 분량에 몸서리치고, 이해에 지칩니다. 갑작스런 논술 바람에 애먼 학생들만 골병이 들고 있는 겁니다.
읽고 쓰기는 쉬운 것부터, 맛난 것부터 시작해 하나씩 쌓아가야 평생의 습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 글 좋은 문장들을 소개합니다. 퍼뜩 읽고, 또 읽을 수 있으면 좋겠고, 한 번쯤 손으로 따라 써 볼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길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젓 때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金起林·1908~?) 시인·문학평론가·영문학자. 호는 片石村. 함경북도 학성 출생. 일본대학 문학예술과 졸업. 1933년 이효석, 박태원 등과 九人會 결성. 6·25 때 납북.
1936년 '조광(朝光)' 3월호에 발표된 글입니다. 읽기와 쓰기공부 하자면서 어째 시를 권하느냐고요? 공부하기 전에 우선 가슴 속에 감동부터 갖자는 얘깁니다.
시(詩)라고 하면 학생들은 소재, 주제, 시적 화자 등의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시험을 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시는 해석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시인의 마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떤 문제라도 풀 수 있습니다.
글쓰기의 출발도 가슴입니다. 논술이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떤 글이든 내 가슴이 울려서 남의 가슴을 울릴 수 있어야 제대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기와 읽기를 배우기 전에 자신의 가슴을 울리게 하고, 그 울림을 듣는 능력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