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대한민국, 국민개병제 맞아?

"신고합니다. 병장 000는 0000년 0월 0일 보병 제 0사단으로부터 보병 제00 예비사단으로 전역을 위한 전출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가끔 취하면 지르는 우렁찬 고함소리다. 정말이지 난 평생토록 이 신고만큼 감격스레 목청을 높인 기억은 없다. 지긋지긋한 내무반 생활, 고향생각 안 나게 해 주겠다며 명절만 되면 등장하는 친절한 구타, 휴머니즘을 포기한 초급장교와 하사관들의 괴롭힘 등등…. 군 생활만 되새기면 떠오르는 우울한 기억들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좋았던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해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제대에 앞서 불과 서너 달 동안 들을 수 있는 육군병장 김 병장….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던 호칭인가. 군대의 기억은 나에게 잊히지 않는 젊은 날의 상처로 휴화산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이른바 병역특혜라는 말만 나오면 활화산으로 폭발한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아들에게 들려줄 땐 제법 재미있는 추억담으로 각색되지만 군은 누구에게나 힘든 한 시절이지 않는가. 아내는 자신의 친구들 남편은 대부분 방위로 때우거나 면제로 가지 않았는데 유독 나만 현역 갔다왔다며 육군병장 콤플렉스가 아니냐고 힐난한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WBC) 4강에 오른 야구선수들에게 병역특례를 해주기로 정부, 여당이 결정했다. 아마추어가 아닌, 직업이 야구인 프로선수에게까지도 병역혜택을 준다고 열린우리당과 정부가 덜컥 결정하자 한류스타들, 나아가 프로게이머들도 병역혜택을 달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체육계 등 찬성하는 쪽은 WBC 4강이 국민에게 크나큰 감동을 줬으므로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여당은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병역특례에 찬성했다는 수치까지 들먹이며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군필 남자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한 자릿수의 찬성도 힘들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개병제 국가다. 모든 국민은 병역의 의무가 있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왔다. 그러나 그 국민개병제는 '힘없고 돈없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다가 참여정부 들어 이제는 한수 더 떠 '능력없는 사람'까지 포함되는 이상한 국민개병제로 바뀌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린 운동선수에게 훈장과 상당한 금전적인 포상이 뒤따른다. 그뿐인가. WBC 경기에 출전한 소속 선수들에는 소속 기업들이 앞다퉈 수억 원의 특별 격려금까지 안겨줬다.

찬성론자들은 이번 경기가 최전방 육군 이등병에게까지 큰 기쁨을 줬기 때문에 특례혜택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등병의 슬픔을 모르는 그들만의 얘기일 뿐이다. 군대 빼낼 수억 원의 돈이 없으면 무릎연골을 깨부수기도 하고, 멀쩡한 손가락까지 잘라가면서 안 가고싶어 난리치는 것이 대한민국 군대다. 오죽하면 진대제 전 장관이 경기도지사 출마와 관련, 늙은 아들을 군대 보내게 돼 "가슴이 미어진다."며 진솔한 부모의 맘을 표현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내놓은 가장 성공적인 정치 슬로건 중의 하는 "땅개 마음 땅개가 안다." 였다. 그들 땅개(보병 소총수의 속어)들이 오늘날 참여정부의 탄생에 한몫하지 않았던가.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군대 뉴스는 아들 가진 부모들을 불안케 한다. 전방부대 총기난사로 수십 명의 꽃다운 젊음이 목숨을 잃었고,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에게 손으로 인분을 치우게 했다는 뉴스에 아내는 불안해 했고 중3 딸은 중 1 남동생에게 "꼭 고무장갑 끼고 X 치우라." 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던졌다. 군대….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한 시절이, 이래저래 다 빠지고 돈없고 힘없고 이제는 능력없는 사람만 가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아들아, 힘없고 돈없고 능력없는 사람만 군대 가는 것은 아니다. 바다 건너에서는 천문학적인 연봉도 마다하고 전쟁터에서 죽은 미식축구선수도 있고 가까이는 최전방을 기꺼이 자원해 간 꽃미남 원빈도 있다. 대한민국은 국민개병제 국가다. 누구나 가야하는 고귀한 병역의무를 정부와 여당이 마치 선심 쓰듯 주물러서는 곤란하다. 인기에 잽싸게 편승하는 정부, 여당의 얄팍한 수법에 열받는 수백 만 육군병장이 있음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김동률 KDI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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