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에서 드네프르강 상류를 따라 북쪽으로 약 90㎞ 정도 올라가면 원자력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사고로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체르노빌 원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철골조 콘크리트로 둘러쳐진 사고 원자로와 화재진압과 구호작업에 동원됐던 헬기와 앰뷸런스 등 2천여 대의 방사능 오염 장비들이 이 곳이 20년 전의 사고현장임을 말해준다.
1986년 4월 25일. 체르노빌 원전 4호기에서는 외부전원이 상실될 경우 디젤발전기에 의해 비상전원이 공급될 때까지 터빈의 관성회전이 원자로의 비상 안전장비를 작동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을 진행하던 기술자들이 시험을 쉽게 끝내기 위해 원자로의 안전장치를 모두 풀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상태에서 외부전원 대신 터빈의 관성회전에 의한 전력이 원자로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만큼 전력이 충분하지 못하자 냉각수펌프 회전이 줄어들면서 원자로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수증기가 발생되면서 수증기 압력이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안전장치를 풀어버린 기술자들은 원자로가 정상 최대출력의 100배에 이르는 출력 폭주가 일어나도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튿날 26일 새벽 1시 23분. 엄청난 증기압을 견디지 못한 원자로에서 증기압에 의한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연이어 2, 3초 후에는 화학반응에 의해 생긴 수소가 불꽃에 점화되면서 원자로 뚜껑이 날아가는 강력한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화재진압 및 구호작업자 31명이 죽고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원자로 반경 30㎞ 이내의 주민 13만 명 이상이 안전지역으로 대피, 이주해야 했다. 방사성물질 중 일부는 기류를 타고 국경을 넘어 주변 국가는 물론 서구 각국에까지 확산되면서 피해가 더욱 커졌다.
구 소련의 폐쇄성으로 인해 정확한 피해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근거 없는 소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만 명이 죽고, 기형아와 기형동물이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임산부가 밤에 빛을 내는 야광아기를 낳았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구 소련정권이 붕괴된 후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했고,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고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특히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국인 벨로루시,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물론 세계보건기구(WHO), 유엔환경계획(UNEP) 등 권위 있는 국제기구들로 구성된 '체르노빌 포럼'이 3년에 걸쳐 조사해 지난 2005년 9월에 발표한 연구보고서는 체르노빌 사고 피해에 대한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보고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방사선 피폭으로 인해 기형아가 발생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며, 또한 위험지역으로 분류된 지역에 거주하던 60만 명의 주민 중 암과 관련한 사망자는 3% 정도로 나타나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조사됐다.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우크라이나 정부는 2002년부터 사고지역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고 있다. 폐허가 된 원자로 주변의 초원 지역은 생태계가 서서히 되살아나면서 멧돼지·늑대·새 등 야생동물들이 뛰놀고 있어 동물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로 국토의 4분의 1이 방사능에 오염돼 불모지가 됐던 벨로루시에서도 지난 2005년에 사고 후 처음으로 호밀·보리·유채와 같은 작물이 수확되는 등 체르노빌 사고 20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원자력의 이용은 철저한 안전대책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원자로는 체르노빌 원자로와는 설계개념부터 다르고, 또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방사능의 외부 누출을 막아주는 격납건물을 갖추고 있어 최악의 경우에도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원자력은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커다란 피해로 이어질 수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는 안전제일주의의 정신과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형준(한국수력원자력 선임연구원)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