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동일의 의식각성의 현장을 찾아서] 자유로움을 향한 내심의 동경

불상 뒤 명문에 새긴 6두품 신라인의 고뇌

감산사(甘山寺)는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서쪽 기슭에 있던 신라의 고찰이다. 괘릉을 옆에 끼고 들어가는 길에는 신식 주택이 여기저기 보인다. 팻말을 보고 찾아가니 같은 이름의 절이 커다랗게 들어서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 터전을 없애지는 않아 다행이다.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95라는 팻말을 얻었다. 연꽃 모습을 둥글게 새긴 돌, 석축 같은 것 몇 가지도 흩어져 있다.

그 곳이 놀라운 문화재가 있던 현장이다. 신라 성덕왕 18년인 719년에 김지성(金志誠)이라는 사람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짓고 불상 둘을 봉안했다. 절은 없어졌어도 불상은 오늘날까지 전한다. 1915년까지 절터에 방치되어 있다가 경복궁으로 이전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 건물 삼층 오른쪽 끝 좋은 자리에 나란히 서 있어 쉽게 만날 수 있다. 과연 그렇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보게 한다.

하나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라고 일컬어지고 국보 81호이다. 높이는 1.83m이다. 대좌 위에 올라 서 있고, 신체 전체 길이의 광배가 있다.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린 자세를 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둥글고 통통한 팔뚝으로 이어진다. 허리와 두 다리의 신체적 특징을 강조하는 옷 주름이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또 하나는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이라고 하는 국보 82호이다. 높이는 1.74m이다. 대좌 위에 올라 서 있으며, 광배가 긴 것도 미륵상과 같다. 풍만한 얼굴이나 몸매가 자비스러우면서 당당하다. 탄력 있고 박진감 넘치는 표현을 갖추고 있다. 위에서 아래까지 바로 이어진 약간 두꺼운 옷이 그런 모습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인다.

불교미술의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인도 굽타시대 불상을 연원으로 하고, 그 수법을 받아들여 중국 당나라에서 만든 걸작품들과 바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외래의 전범을 신라에 맞게 재창조한 안목과 수법이 뛰어나다. 종교적 이상을 사실주의 수법으로 구현한 좋은 본보기이다. 8세기가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전성기임을 입증하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한다.

두 불상은 명문이 있어 더욱 소중하다. 누가 어느 부처를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글이 등에 새겨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불상 자체만큼 소중하다. 모셔둔 곳에 가서 두 불상을 직접 보는 사람들도 뒤로 돌아가지는 않아 명문이 있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 명문을 들여다보아도 읽기 어렵다. 해독해놓은 책의 도움을 얻어야 알아볼 수 있다.

불상과 명문을 둘 다 보고 평가해야 한다. 불상 조각이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듯이, 명문 또한 문학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명작이다. 미술과 문학을 함께 존중해 같이 창작한 신라인의 식견을 재인식하고, 오늘날을 반성하게 한다. 미술은 미술이고 문학은 문학이어서 다른 쪽의 사정은 알지 못하는 잘못을 바로잡도록 한다.

명문을 옛 사람도 소중하게 여겨 '삼국유사'의 한 대목에 실어 놓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전문이 아니고 오자가 많다. 베낄 때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볼 수 있는 탁본이 더 명확해 연구 자료로 삼으면서 '미타조상기'와 '미륵조상기'라고 일컫는 것이 상례이다. 내가 쓴 '한국문학통사'에서 이 둘을 '성덕대왕신종명'과 함께 한창 시절 신라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했다. 금석문은 돌보지 않고 문헌만 뒤지고서는 문학의 유산이 너무 적게 남아 있다고 한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성덕대왕신종명'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글을 육두품 문인이 맡아서 써서 내용과 필자 양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둘은 개인의 글이다. 육두품 문인이 쓴 것은 같지만, 글쓰기 전문인의 기능을 보여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 관해 말했다. 집안의 내력을 소개하고, 자기 경력을 알린 다음 내심을 술회했다.

김지성은 아버지가 7등급이었고, 자기 자신은 6등급에 이르렀다고 했다. 육두품 가문이라는 말이다. 6등급은 육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지위이다. 죽은 부모를 위해 불상을 세우고 조상기를 써서 관련되는 사연을 적는다고 했다. 진출에 제약이 있는 육두품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과 의식의 각성을 얻은 것이 주목할 일이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사연은 더욱 놀랍다.

부모의 명복을 빌려고 불상을 봉안한다는 것이 말하고자 한 요지이다. 그런 글이라면 자격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 거기 보태서 한 말이 더 길다. 부모를 앞세워 자기 말을 하고, 신앙을 표방하고 자유로운 발언을 했다. 본말 전도라고 할 수 있는 파격적인 방법을 써서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소상하게 나타냈다. 공식화된 순서에 따라 정해진 사연을 적는 글을 이용해 심정 술회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면의식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문학을 시작하는 획기적인 전환을 보여주었다. '미륵조상기'를 보자.

태평성대에 나서 영예로운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고 자랑했다. 지략이라고는 없으면서 시대를 바로잡는 임무를 맡았다가 형벌을 당하는 것을 겨우 면하고 이제는 물러나고자 한다고 했다. 신분과 관련된 의무가 없어 진퇴를 임의로 결정하는 후대의 선비가 할 만한 말을 몇 백 년 앞서서 했다. 연대가 분명한 금석문이 아닌 필사본으로 전한다면 후대인의 위작이라고 하기 알맞은 내용이다.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산수 사이에서 노닐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감상에 젖어 있는 문구로 술회했다. 관직의 구속에서 벗어나 산수 속에서 노니는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이 상당한 정도로 자라났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당시 사람들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그 대목을 들어보자.

천성이 산수와 어울려 노장(老莊)의 소요(逍遙)를 흠모하노라. 뜻이 참된 경지를 존중해 머무르는 데 없는 아득한 적막을 희구하노라. 나이 예순하고도 일곱이라, 맑은 조정에서 임금 섬기는 일을 그만두고 마침내 한가한 들로 돌아가노라. 오천 언 '도덕경'(道德經)을 통독하면서, 이름과 지위를 버리고 아득한 경지에 들어가겠노라.

유학의 능력으로 벼슬을 했을 사람이 불상을 봉안하면서 노장의 소요를 흠모한다고 했다. 유가·불가·도가 사상을 함께 갖추면서 도가를 으뜸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름과 지위를 잊고 물러나 전원에 은거하면서 적막을 희구하고 아득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신라의 육두품은 기능인이었다. 한문으로 글을 쓰는 것이 주된 기능의 하나였다. 하위 관직에 머무르면서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사람의 도리를 논할 처지는 아니었다. 문학 창작을 힘써 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사상을 이룩할 만한 능력이나 식견은 갖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위치이다.

공식적인 위치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이면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고 이상을 키웠다. 기능 연마를 위해 익힌 한문이 정신 성장의 촉진제 노릇을 해서 사회적 장벽과 함께 종교의 울타리도 벗어나게 했다. 불상 조상기에서 유가사상도 말하고 도가에서 얻는 자유를 더욱 평가한다고 했다.

이 글은 이중의 장벽을 넘어섰다. 성골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의 하위 기능인이 자기 말을 마음껏 하는 작품을 창작했다. 불상을 조성한 경위를 말하면서 종교를 거치지 않고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심정을 나타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경이로운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좋은 자리에 잘 모셔놓아 쉽게 찾아가 불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누구나 찬탄할 수 있다. 그러나 불상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어진 제약을 물리치고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내심을 나타낸 사연이 있는 줄 모른다. 유식이 극도에 이른 시대의 무식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이다.

감산사에 불상을 봉안할 때에는 뒤의 명문도 함께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앞뒤가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제 그 곳은 폐허가 되고 불상만 더 좋게 보이는 자리에 옮겨놓았다. 조각의 아름다움을 해설하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면서 뒷면의 명문은 더욱 무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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