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름다운 노년, 보람에 산다"…자원봉사하는 노인들

인생은 60부터다. '현실'이라는 올가미를 풀어헤치고 새로운 삶을 꿰어갈 수 있는 것이 황혼. 그 만큼 황혼의 인생은 청춘 못지않게 소중하다. 많은 노인들은 늙음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하지만 여기 3인방은 젊었을 때 하지 못한 '봉사'로 오히려 당당하다. 소리 없이 남을 돕는 그 자체가 인생의 또 다른 재미라는 어른들을 만났다.

#

한정식(78) 할아버지의 손에는 매일 빗자루 하나가 쥐어진다. 쓸고 또 쓸고, 힘들만도 하지만 한씨는 "그렇게 생각하면 못 한다"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가 청소하는 곳은 다름 아닌 손자들이 다니는 대구 본리동 덕인초등학교 정문 앞. 매일 손자들을 바래다 준 뒤 버릇처럼 학교 앞을 책임진다. 벌써 1년 반이 흘렀다.

"2년 전 가을쯤이었어요. 수업하기에 앞서 아이들이 학교 앞 청소를 하는데 여간 어설프지 않더라고요. 낙엽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 말이죠. 청소하는 건 내같이 나이 먹은 사람이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묵묵히 빗자루를 든 덕분에 이젠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 "한 번씩 교장실에 가서 커피도 얻어먹어요. 정문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꼬박꼬박 인사도 하죠." 지금은 오히려 이런 모습이 부담스러워 아이들 등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정문 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저 손자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며 되뇌지만 정작 모든 학생들이 손자 같기는 마찬가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 하겠냐."라며 반문하는 그의 모습은 정 넘치는 우리네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

"저승에도 카드 시대." 신천호(69) 할아버지의 첫마디에 귀가 솔깃했다. 단순히 "뿌듯하다."라는 말을 예상했다가 생소한 대답에 놀랐다. "살아있을 때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서 카드 마일리지가 적립되듯 공덕이 쌓인다고 생각해요." 그의 봉사에 대한 변은 꽤나 논리적이다.

그런 만큼 신 할아버지의 봉사는 체계가 잡혀 있다. 요일별로 다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 월요일엔 앞산 등산로에서 자원보호활동을, 화요일엔 달서구노인대학에서 문화탐방 강의를, 수요일엔 문화유산해설을, 금요일엔 저소득층 어린이를 대상으로 역사교육을, 토요일엔 지체 장애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고 있다.

특히 7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주 목요일에 도시락 배달을 나서는 것은 신 할아버지의 둘도 없는 자랑거리. 대구 동구청에서 음식을 만들면 인근 홀몸 노인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손수 나르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도시락 배달은 빼먹지 않아요. 만약 내가 나서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점심을 거르게 되니까요."

신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은 같이 일하는 공무원까지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남들을 위해 일을 하니까 지금껏 건강하게 사는지 모르죠. 앞으로도 몸이 닿는 한 꿋꿋이 뛰어다닐 겁니다."

#

컴퓨터에 익숙하다 못해 컴퓨터 무료교육에 발 벗고 나선 이희락(77) 할아버지. 그와 컴퓨터의 인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북대 명예학생으로 있을 때 처음 컴퓨터 교육을 받았죠. 하지만 처음에 너무 어려워 따라가질 못하니까 다른 학생들 눈치가 심했어요. 할 수 없이 컴퓨터 교육을 그만두었죠."

하지만 딸이 구세주로 나섰다. 거금 250만 원을 들여 컴퓨터를 장만해준 것. 그는 학교에서 받은 설움을 곱씹으며 5개월 가량 독학으로 컴퓨터와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컴퓨터 수업을 수료하게 되었고 초보들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붙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무료로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각 복지관을 돌아가며 청각 장애인들이나 불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죠." 한글이나 인터넷을 주로 가르친다는 이 할아버지는 "몇몇 학생들이 수업 중 인터넷 게임을 할 때는 속상하기도 하다"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학생들이 컴퓨터를 배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메일을 보낼 때는 그런 속상함도 사르르 녹는다.

"교육을 하기 전엔 내 일도 못하는데 남의 일을 어떻게 돕냐고 생각할 때가 있었죠. 하지만 막상 봉사를 하니까 진작 못 한 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새롭게 봉사에 눈을 뜬 이 할아버지의 또렷한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한 아름 배여 있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정재호편집위원 newj@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