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혁당 31주기'…"이제 편히 눈감겠지요"

'인혁당 사건' 미망인 신동숙 씨

"30여 년 전 숨진 남편들도 이젠 편히 눈을 감게 되겠지요."

신동숙(77·여·대구 달서구 송현동) 씨는 갑작스레 떠난 남편(도예종·당시 51세)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고 자란 남편은 하루 빨리 남북이 통일을 이뤄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랐어요. 단지 그 뿐이었는데…. 당시엔 대학생들의 데모도 많았던 때라 정권에선 관심을 돌릴 곳이 필요했겠지요."

아침 일찍 찾아온 손님을 따라나섰다 연락이 끊겨버린 남편. 수소문 끝에 몇 달 만에 서대문 형무소에 있음을 확인했지만 면회는 고사하고 편지왕래조차 할 수 없었다. 재판정에 선 남편 뒷모습을 먼발치서 볼 수 있었을 뿐.

꼭 31년전인 1975년 4월 8일, 남편은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이른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였다.

사형선고 이튿날. 행여 면회가 될까 싶어 교도소 앞을 찾았지만'면회불가'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 와중에 함께 간 일행 중 한사람이 방송에서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한 것. 신 씨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장례를 치를 때도 가족 외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무서웠을 테지요. 자신들도 피해를 입을까봐. 당시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였으니까요."

그뒤 한국전력에서 일하던 큰 아들이 강제퇴직을 당하고 미국유학을 준비하던 조카 역시 출국조차 할 수 없게 되는 등 가족들의 삶은 엉망이 됐다.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이웃을 포섭, 일자리까지 구해주며 제 일상을 일일이 감시하도록 했어요. 남편이 남긴 집을 팔아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형사들에게 끌려와 집안에 갇힌 것도 여러 차례였고요."

이영교(72·여·대구 동구 방촌동) 씨의 지난 31년 역시 잔인한 세월이었다. 목욕탕에 간다며 집을 나선 남편(하재완·당시 43세)은 소식이 끊겼고 몇 달 만에 법정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편 역시 인혁당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겨우 서있던 남편은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이 씨와 자녀(2남3녀)는'빨갱이''간첩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오랫동안 벗지 못했다.

"주위에선 우리를 전염병 환자처럼 취급했어요. 독재에 반대했을 뿐이라며 이곳 저곳을 찾아다녔지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눈앞이 막막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씨의 어린 자녀들은 정신적 상처가 더욱 컸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욕하는 아이들과 숱하게 싸워 고등학교만 3번 전학해야 했고 다른 아이들도 '간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 돌팔매질을 견뎌야 했다.

감시의 눈초리는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도 여전했다. 편지는 뜯어본 자국이 있기 일쑤였고, 외국 귀빈들이 한국에라도 들리면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다.

"창살 없는 감옥이었지요. 수시로 방안까지 들락거렸으니까요. 제 친정은 가산을 탕진해가며 독립운동을 한 집안입니다. 이런 나라를 지키려고 그렇게 외세와 싸웠나 싶어 더 억울했어요."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절차가 이뤄지고 있는 올 해. 이들은 '먼저 간 사람들'의 한(恨)을 이제야 풀어줄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워했다.

'4·9 통일열사 31주기 추모제'란 이름으로 강연회나 문화제 등도 잇따르고 있다. 남편의 명예회복이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사람은 이달 곳곳에서 막을 올리고 있는 명예회복 행사를 보며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지난해 재심결정이 내려진 뒤부터 마음이 편해졌어요.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젠 정권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재판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을 되새겨준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한편 추모제 준비위원회는 8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추모제를 연 것을 비롯, 같은날 오후 7시엔 대구 2.28기념중앙공원에서 '4.9통일열사 31주기 추모문화제'를 연다.

준비위는 또 9일 오후 1시엔 도예종 씨 등 4명이 묻힌 경북 칠곡 현대공원 묘소 참배행사를 갖고 같은날 오후 3시 2.28기념중앙공원에서 추모제 본행사를 개최한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