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일 신문을 장식하는 서글픈 이야기들 속에서 많은 국민들은 참담한 느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잘나가던 사람들이 저지른 탈세와 편법 증여, 각종 불법 로비와 비자금 추문, 그리고 갑작스런 해외도피 등….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상류층을 비교해보게 된다.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라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는데, 그 뿌리는 유럽의 상류층에서 연원한다고 한다. 로마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럽의 이 전통은 그들의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버팀목으로서 작용해왔다.
로마의 귀족들이 솔선수범하여 위험한 전장에 나아간 것을 시작으로 국가재정을 위해 평민들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거나 전시에 발행한 국채를 평민에게는 부담시키지 않고 상류층들이 사들이면서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은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를 격파하고 유럽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1,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귀족들이 다니던 명문학교인 이튼칼리지 졸업생 중에 2천 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왔던 것이나, 1982년 포클랜드 전쟁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가장 위험하다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했던 영국의 사례 또한 눈길을 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선진국에서 나왔듯, 그들 상류층은 재산과 권력 그리고 위신(威信)만 높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수준 또한 매우 높다. 그것이 그들 상류층이 '존경받는 상류층' 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나라다. 누구든 성실하게 일하여 돈을 벌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거나 자기만족을 얻는 것이 철저히 보장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몇몇 재벌기업들의 경영권 상속행태는 이러한 보장의 테두리를 무색게 하고 있다. 도덕적인 결함뿐만 아니라 법적인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상습에 대한 과세를 피하기 위해 뻔히 보이는 편법을 공공연히 활용하고, 심지어는 주주들의 이해에 반하는 방법들도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의 세습' 과정에서 간접적인 탈세를 행하거나, 법망을 교묘히 피해 경영역량이 검증되지 않은 재벌 2세들에게 경영권을 이양하는 재벌가의 모습은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 즉 의무를 망각한 신분집단' 또는 '천민적 상류층'이라는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돈버는 데 뭐 보태준 것 있나? 내 재산 내 맘대로 한다는데 무슨 말들이 그리 많은가?' 하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축적하거나 재력을 얻는 데 있어 사회와 주주, 그리고 국민들을 속이고 기만한 사실이 없다면 얼마나 떳떳하게 존경받을 수 있을까?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법적 테두리 안에서 투명하게 세금을 내면서 상속을 하고, 경영권은 경영역량을 인정받은 사람-그 사람이 재벌 2세이든 전문경영인이든-에게 맡길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한다'고 말한다면 아직은 너무 이른 것일까? 존경받는 부자가 많아지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바람은 너무 이상적인 것일까?
게다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각종 게이트에 사회지도층인 고위공직자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인사들이 연루되고 배후세력으로 언급되어 국민을 슬프게 하고 삶의 의욕을 저하시키는 현실도 우리의 시름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필자는 로마와 영국의 상류층이 고도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지켜감으로써 사회통합에 공헌하고 리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온 것을 우리의 재벌기업들과 사회지도층이 곱씹어볼 것을 촉구한다.
성공한 기업가들과 사회지도층은 그들이 향유하는 재력과 권력에 걸맞게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다함으로써 건전한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오늘날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가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애타게 기대해보는 이유이다.
우리사회의 상류층이 보여줘온 각박하고 서글픈 모습과는 달리 삯품팔이와 식당운영으로 모은 전재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신 '건국대 할머니' 이야기처럼 상대적으로 '없는 사람들'의 고귀한 미담이 봄비처럼 대지를 촉촉이 적실 때면 '아직도 이 땅에 희망은 있다.'고 낙관해본다.
배영식 한국기업데이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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