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재미있습니까?

'말라꼬'란 경상도 말이 있다. 누가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나 호의를 베풀 때면 '말라꼬 이카노'라는 표현을 쓴다. 표준말로 바꾸면 '뭐 하려고(무엇 때문에) 이러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상대의 의도를 묻거나 호의를 거절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감사합니다'란 표현이다. 고맙다는 말을 왜 이러느냐는 전혀 엉뚱한 말로 바꿨을 뿐이다.

'어디 가노' 라는 인사도 어디를 가는지 묻는 말이 아니다. 서양식으로 치면 'how are you'란 말과 다름 아니다. '안녕'이란 말을 대신한 인사다. 물론 어디를 간다는 대답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냥 '응'하고 지나가면 된다.

"재미있나"란 말은 생활의 재미를 묻는 인사가 아니다. 재미있다고 답할 사람이 없는 판에 재미있는지를 묻는다면 이런 엉터리도 없을 터다. 피곤한 현실에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는 심정을 서로 나누는 말이다.

경상도 말은 이런 표현이 많다. 바로 가지 않고 에둘러 간다. 그래도 누구나 짐작하고 당황하지 않는다. 둘러가며 나와 너를 보듬는다. 바로 가는 말이 되레 어색하다고 여긴다.

전국 팔도가 경상도 사람을 좋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이를 되레 깍쟁이로 매김하는 대신 둘러가며 마음을 전하는 경상도 사람들을 의리 있는 넉넉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렇다고 느릿느릿하지도 않다. 어느 누구도 가난에서 풍요로 나라를 바꾼 동력이 경상도에서 비롯됐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라는 게 나라 안의 경상도 평가다.

그렇게 넉넉하던 경상도 마음들이 지치고 찌들고 있다. 내남없이 넉넉한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갈수록 나아진다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어렵고 힘들다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골치 아프다는 사람이 득실댄다.

군사독재도 '북괴의 침략 야욕'도 저만치 갔고 부정 비리 청소도 할 만큼 했는데도 나아졌다는 사람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민주화 주역들이 나라 살림을 맡고 인권과 개인의 행복을 외친 이들이 사회 곳곳을 지키는 데도 나라 꼴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직선제를 외친 결과 이제는 아파트 운영위원장도 투표로 뽑고 '시장'구청장에서부터 대학 총장도 선거로 결정한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국회나 중앙'지방정부가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 차라리 권위주의 시대엔 선발했기에 더 유능하고 나았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내 몫이 줄어들면 남녀노소 누구나 시위에 나서고 공익을 지켜야 할 경찰은 두들겨 맞고도 말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데모가 한두 곡쯤은 알아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격이 있을 정도다.

참교육을 외친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흔들리고 있다. '빳다'와 촌지가 사라지면 참교육이 되리라 여겼지만 지금 우리들의 학교는 희망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 돈 없으면 공부도 못하는 현실에 교육을 통한 위치 이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

샐러리맨에겐 승진도 달갑잖다.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나가야 한다. 말로는 전문가와 원로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는데도 노년은 외면을 받는다. 노인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말고 쉬라는 한 마디에 선거 판도가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노년의 경험을 존중해 주는 사회가 아니다. 말로 입에 담은 죄의 값일 뿐이다.

철마다 검진을 받지만 무병장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알지도 못하던 새로운 병들이 생겨나고 없던 병이 찾아온다.

에둘러 가며 여유를 부리던 우리 경상도 마음의 갈증을 풀어 줄 단비는 언제나 올까. 나와 오늘이 정당하면 남과 어제도 인정하고, 내 몫이 소중하면 남의 몫도 귀한 줄 아는 여유는 언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까. 어디 재미있는 사람 없습니까?

서영관 논설위원 seo123@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