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 (14)영덕 복숭아 재배농 이상근씨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차마 첫 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시인은 이렇게 복사꽃을 노래했다. 마치 바람난 새댁이 숨는 곳처럼 보이지만 복사꽃은 첫 사랑에 대한 새댁의 애틋함이 가득 숨어있는 곳이다.

요즘 영덕에는 복사꽃 세상이다. 영덕에는 '바다엔 대게, 육지엔 복숭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복숭아 재배농이 많다. 영덕에 복숭아가 많은 것은 1959년 사라호 태풍때 부터다.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사라호 태풍때 영덕의 논밭도 폐허가 됐다. 그 때 무너져버린 땅위에 주민들은 복숭아 나무다.

영덕 지품면 삼화리의 이상근(48) 씨. 20년이 넘게 복숭아만으로 한우물만 파고 있는 도인(桃人)이지만 복숭아 농사가 싫어 고향을 뛰쳐나간 적도 있다.

15살 때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갔다. 노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소년 이상근은 서울에서 야간 중학교에 다니며 낮에는 공장에서 일했다. 가수가 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 서울 생활 3년만에 첫 레코드 취입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유명했던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기로 하고 레코드 취입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어렵게 준비한 300만 원을 사기당해 가수의 꿈이 산산조각났다. 어쩔 수 없이 5년동안이나 무명가수로 밤무대를 전전하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의 복숭아밭으로 돌아왔을 때가 23살. 노래에 미쳤었지만 이제는 복숭아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이 한자에 나무 목자(相)와 뿌리 근(根)이 들어있는데 이름이 지어질 때부터 천상 나무와 씨름하면서 살아가라는 운명이 주어졌던 게지요."

아버지의 오랜된 관행농법(때 되면 비료주고 농약치는)과 변화를 시도했던 이씨는 수시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25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복숭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청도와 충북 음성, 조치원 등 복숭아가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뛰어다니며 배웠다. 우직하게 몸으로 때우며 배운 것을 소화시킨 이씨에게 기회가 온 것은 10년전. 전업 복숭아농으로 뛰어든지 10년이 훌쩍 넘어서다. 복숭아농으로는 처음으로 Y자형 복숭아를 개발한 것이다. Y자형은 가지가 양쪽으로 갈라져 자라기 때문에 태양빛을 골고루 받아 열매가 잘 열리며 당도가 높다. 또 수확때는 공간확보가 쉬워 작업도 훨씬 편리하다. 이런 편리함 때문에 이제는 Y자형 복숭아 나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농약의 폐해를 안 이씨는 이 때부터 농약도 쓰지 않았다. 복숭아밭 휴식년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보리와 밀을 심어 땅심을 돋우고 나무밑에 수북히 자란 잡초를 일일이 베어 토착 미생물과 발효시켜 퇴비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불가사리 액비, 녹즙, 목초액비 등을 부지런히 뿌려 살균과 살충작업을 한다.

그 노력으로 5년 전에는 농림부로부터 복숭아 친환경 1호로 선정됐다.

"그 때 만족하고 멈췄으면 그저 그런 복숭아 농이 됐겠죠. 그런데 복숭아 통조림처럼 친환경 복숭아를 사시사철 즐길 수 있도록 뭔가를 만들어 내고 싶었습니다."

결론은 '병조림 복숭아'였다. 밭에서 갓 딴 싱싱한 복숭아를 깎아 자른 뒤 병에 채우고 약간의 설탕을 넣는다. 이 병을 솥에 거꾸로 넣어 끓이면 병조림 복숭아가 된다. 전국 최초로 개발된 병조림은 전국의 친환경매장에서만 판매된다. 대량 판매 위주의 할인매장에는 공급하지 않는 것은 이씨의 자존심이다.

요즘 이씨는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관광객들 때문이다. "복사꽃이 한창인 4월이면 해마다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듭니다. 이 때 손님들에게 복숭아와 복사꽃에 대해 알려주고 직접 생산한 병조림을 소개할 때면 정말 신이 납니다."

7천여평 복숭아밭에 연간 2천 상자의 복숭아를 생산하고 있어 돈도 꽤 벌었을 것 같지만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느라 모아둔 돈도 별로 없단다. 이제 빚을 다 갚아 올해부터는 부자가 되지 않겠느냐면서 웃었다.

"지금까지 복숭아 농사를 지었지만 한번도 포기할 생각은 안했습니다. 10년 전 우박이 쏟아져 2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하고 약초를 캐 생활을 꾸려나갈 때도 있었지만 그만 둔다는 생각은 안했죠. 아마 철없던 시절에 노래를 부르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돌아 온 경험때문인지 다시는 나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도 노래를 좋아하는 천성이 어디가랴? 아내가 시끄럽다고 구박하지만 아직도 옛날 버릇이 남아 늘 노래부르는 그를 보고 있으면 천상 농사꾼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든다.

영덕·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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