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원효 성지①

훌쩍 떠난다. 주말이면 일상을 털어내고 길 떠나는 사람들로 산하는 술렁인다. 아무런 목적없이 순수하게 떠나 자연이 주는 신비와 풍요를 가슴 가득 채워오는게 여행의 가벼운 맛이다. 그러나 그냥 겉만 보고 지나기에는 5천년 산하에 묻혀 있는 얘기가 너무 많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현실'이지만, 그 아프고 고통스런 현실이 종교와 어울러져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자연에 숨겨 두었다. 인간이 맞닿뜨리는 '현실'이란 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며 문화와 사상으로 피어난 종교와 관련된 성지(聖地)를 찾아본다.

원효 성지①

◇ 왜 원효 성지인가

우리나라에 불교 성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신라·고려 때 불교가 국교로 책정된 이래 수많은 불교 성지가 남아있지만, 원효(元曉, 617~686) 성지가 으뜸이다. 왜? 단언컨대 이 땅에 불교가 전래(서기 372년)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원효를 능가한 이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뿐 아니라 눈을 넓혀 세계를 바라보아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서쪽에서 종조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한 후 5백년 만에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인도의 용수(龍樹) 보살이 태어나 대승불교를 열었고, 그로부터 다시 5백여년 만에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해동(海東)에서 원효가 태어나 불교를 마무리지었다는 '서건동진금아해동'(西建東進今我海東) 얘기가 통용될까. 원효는 그 이름자(으뜸 元, 새벽 曉)가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사적으로나 정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부처님을 빛나게 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불교의 새벽을 열었음에 틀림없다.

◇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로 극락왕생 할 수 있어

석가모니가 열반(BC 560년 경)한 이래 인도의 소승(원시) 불교는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서로 자파만이 최고라고 우기던 때에 용수보살이 나타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보리-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을 실천하는 대승불교를 집대성했다. '큰(마하 maha) 수레(야나, yana)'라는 뜻을 담은 대승불교는 출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깨달음의 특권을 사부대중 누구나가 다 깨쳐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보살의 정신으로 지닌 보편성이 특징이다. 만행 끝에 욕망은 번뇌를 낳을 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생불(生佛)이 바로 용수 보살이라면 원효는 특권층만 누려오던 신라의 귀족불교를 사부대중에게 다 환영받는 만민의 불교가 되게 하였다. 원효는 "누구나 쉽게 '나무아미타불'을 연호하면, 죽어서 부처님의 마중을 받으며 극락왕생할 수 있다"며 서민들 편에 섰다. 불자라면 달고 사는 '나무아미타불'은 원효가 가르쳤고, 결국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영원한 기도가 됐다.

◇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원효

종조 석가모니의 뒤를 이은 용수, 그리고 마명에 비견되는 원효(617~686.3.30)의 출생 성지는 경산 자인이다. 더 정확하게는 율곡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이지만 그 나무가 구체적으로 어느 나무인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원효 탄생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담날(속가에서 원효 아버지)의 집은 밤나무골(栗谷) 서남쪽에 있었다. 만삭인 아내가 이 골짜기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히 산기를 느꼈다. 담날은 겉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그 가운데를 (출산)자리로 정하였다. 그 나무가 사라수이다." 유성(流星)이 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던 모친이 급작스런 산통 끝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길에서 아들을 낳았다. 마치 마야부인이 싯달타를 길에서 낳은 것처럼. 이로 인해 옷을 걸었던 밤나무를 '사라수'라 하고, 그 나무에서 열리는 밤을 '사라율'이라 불렀는데, 이 사라율 한톨이 한 바루에 꽉 찰 만큼 컸다. 현재 사라수는 알지 못하지만, 아들 설총이 그 밑에서 땀을 흘리며 공부했다는 유곡리 나무 부근에는 지금도 개미가 살지 못할 정도로 땅이 짜다고 한다.

◇ 원효 출생 성지에 세운 사라사는 어디?

도대체 이 사라사는 어디인가. 현재 자인면 북사 1리에 있는 영천 은해사 말사인 제석사는 원효 출생 성지라며 매년 단오 전날(음력 5월4일) 원효대제를 드린다. 도천산 제석사라 하지만 원래 도천산(현재 대경대 뒷산) 제석사지와는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에도 밤나무 없이 인가만 있다. 제석사 노 신도들은 약 400년전, 이곳에 밤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일굴 때 불상과 연등대 등이 출토되어 막연히 성지로 생각하고 조그마한 절을 지어 제석암으로 했다가 더 힘을 모아 제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런 유래는 제석암을 헐고 칠성각을 지을 때 헐린 제석암 상량문에 적혀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제석사에는 창건 당시에 출토된 불상과 파손된 연등대가 보존되어있다. 이 불상은 근년에 도금돼 원형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약사여래상이고, 좌대석, 연등대석에 새겨진 조각양식이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확인되어 원효대사와 활동 시기와 비슷하다. 최근 제석사 적연 스님은 원효성사전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처럼 원효 일대기를 담은 8폭 벽탱화를 모셔 이해를 돕고 있다.

◇ 초개사는 자인면 유곡동일까?

청년 원효는 7세기 어느날(15세 혹은 29세) 발심하고 출가했다. "좋은 음식을 먹어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끝이 없다.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도 보전하지 못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대덕이 되기를 원했던 원효는 출가한뒤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초개사는 어디일까. 일부 학자들은 '경주지'에 원효 아들 설총은 유곡동에서 태어나 여천동에서 자랐다고 명기된 것으로 미루어, 유곡면이 원효의 본가라고 믿고 있다. 복숭아꽃이 천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유곡면 279번지에는 설총 유허비와 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오래된 석재가 여기저기 늘려있고, 부근에서 신라토기 고려 와편 등이 지천으로 깔려있어 초개사였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유곡면에 들어선 원효사 일대 지형을 보면 원효 설총 일연 삼성현이 태어날만한 성지임이 느껴진다. 이밖에도 경산과 팔공산 일대에는 원효 성사가 도를 깨쳤다는 오도암(팔공산 비로봉 청운대 절벽 아래), 수도처 원효굴(와촌 불굴사 내), 원효가 창건한 원효암(와촌면 대한리), 의상과 함께 수도한 수도사(영천 신령 치산리, 비로봉 선주암 폭포계곡) 등이 있다.

◇ 경주 분황사에서 27일 원효대제 열려

국내 사찰 가운데 원효 의상 지눌을 모시는 절은 절반을 넘는다. 특히 국내 어디든지 무애행을 실천하며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이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을 교화했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도당 유학을 도전했으나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뒤 바랑을 챙겨 되돌아왔다. 그때가 불혹을 넘어선 시기였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얻은 뒤, 100여부 24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는 27일 오전 11시에는 주석하면서 화엄경소를 지었던 분황사에서 입적 1320주년을 기념하는 원효대제가 열린다. 저술로나, 불교학적인 해박함으로나 원효는 위대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원효 성지를 둘러보며 우리가 얻는 의미는 원효의 육바라밀 실천이다. 불교가 뭔지, 석가모니가 뭔지도 모르던 신라의 백성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정토에 들 수 있다며 희망을 심어준데서 원효는 영원한 빛을 발한다.

글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 기자 vin@msnet.co.kr

(도움말 경주 망월사 천주스님, 대구한의대 조춘호 경산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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