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은 언제나 의식을 흔드는 한 차례 요란한 먼지바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올 봄엔 황사(黃砂)가 극성이듯이, 그런 선거바람 때문에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기 난감하다. 서로 '죽이기 작전'으로 치닫는 혼탁 양상은 여잔히 천박하고 비열하다는 느낌까지 안겨준다. 마치 판단력을 잃게 하려는 듯 '선동에 선동'이라면 과장일까.
윈스턴 처칠은 '정치란 것은 전쟁 못잖게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똑같이 위험하다'고 말한 바 있다. 난마(亂麻)처럼 얽혀 소란한 지금 우리의 정치문화는 바로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 같다. 고대 로마의 디오니소스가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동 정치가에게 권력을 맡기는 일'이라고 한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폭로'가 기승이다. 막판에는 더 심하게 쏟아질는지도 모른다. 청와대 주요 인사의 인사 청탁 관련 수뢰 의혹, 여당 시장·도지사 후보와 관련된 탈세 의혹, 서울시의 개발지구 분양 특혜 의혹, 서울시장 별장 파티 공개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부분 선거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 반응이 지난날과 같지는 않은 듯하다. 그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마저 없지 않다. '경악할 비리' 폭로에 되레 역풍이 이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편에서조차 '경솔' '유감'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근거가 뚜렷하지 않거나 알맹이가 빈약한 데도 과대 포장되고, 발언 수위만 높은 사례가 잦아서가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그보다 더한 이유는 지난날 선거 때 터져 나왔던 폭로들이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뒤 허위(虛僞)로 판명돼 '속았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경험에 비춰지는 데 있지 않을까. 김대업 씨와 얽혔던 '병풍' 조작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폭로한 쪽은 톡톡한 재미를 봤으나 당한 쪽(당시 이회창 대통령 후보)은 거의 치명적이었다.
선거철에 이런 '고질병'이 도지는 주요 원인은 우선 상대방을 깎아내리면서 흠집을 내고 보자는 '저의(底意)'와 불리하면 일단 뒤흔들어 놓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전략(戰略)'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비약일까. 하지만 정치권은 그런 의혹을 떨칠 수 없게 하는 일들을 멈추지 않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선거전은 일정 기간만 필요로 하지만, 그 진실 캐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게 바로 함정이다. 그래서 '폭로'가 어김없이 선거철의 단골 메뉴로 뜨며, '소기의 목적 달성용'으로 사랑(?)받는 세태이지 않은가. 이기려면 양심은 일단 팽개쳐 두고 '가려진 진실'을 그럴듯하게 왜곡 포장해서 퍼뜨리며, 의도했던 목적이 이뤄진 뒤에는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도 '물 건넌 뒤'가 돼 버리기 십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의 선거 풍토를 볼 때, 폭로는 '한탕주의'의 효자였다. '거짓 진실'을 과감하게 터뜨린 다음 표 몰이를 한 뒤엔 고소를 당하더라도 법적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적잖이 걸리므로 책임은 미미해지곤 했다. 그러나 무책임한 폭로는 이제 사라져야만 한다. 선량한 사람들을 목적에 이용하는 악의적인 선동에는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만 한다.
'공천 장사' 등 온갖 추태들도 그렇지만, 폭로의 행태들을 보면서는 선의를 저버린 저질 정치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불신과 무관심과 냉소를 키우며, 어지러워 눈을 가리고, 악취가 나서 코를 막으며, 불순한 폭로에 귀를 막고 싶은 사람들 역시 그럴 게다.
훌륭한 정치는 정직하고 창조적인 국민을 전제로 한다. 앞선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배경에는 훌륭한 정치가 못잖게 창조적인 일에 집중하는 국민과 객관적이고 차분한 사회적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국민이 그런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라 했다. 자연의 현상은 하나같이 모순·대립이라는 싸움이나 갈등에 의해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화해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만물의 아버지도 정도가 문제다. 그 한판 승부는 선(善)이 악(惡)을,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을 이기고, 진정한 정치철학이 비속한 인신공격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이태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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