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에 와서 중·고등학생들의 가두행렬이 매일의 다반사처럼 되어 있다. 방학 동안의 훈련을 겸한 某種(모종)행렬만이 아니라 최근 대구시내의 예로서는 縣官(현관)의 出迎(출영)까지 학생들을 이용하고 서열을 지어 3, 4시간 동안 소중한 공부시간을 허비시키고 殘暑(잔서)의 暴陽(폭양) 밑에 서게 한 것을 목격하였다. 그 현관이 대구시민과 무슨 큰 인연이 있고 擧市的(거시적)으로 환영하여야 할 대단한 국가적 공적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수천수만의 남녀학도들이 면학을 집어치워 버리고 한 사람 앞에 십 환씩 돈을 내어 手旗(수기)를 사가지고 길바닥에 늘어서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 못한다. 또 학생들은 그러한 하등의 의무도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괴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학교당사자들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관청의 지시에 의하여 갑자기 행해졌다는 것을 들을 때 고급행정관리들의 상부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들을 이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입을 벌리면 학생들의 질을 개탄하고 학생들의 風紀(풍기)를 云謂(운위)하는 지도층이 도리어 학생들을 이용하고 마치 자기네 집안의 종 부려먹듯이 공부시간도 고려에 넣지 않은 것을 볼 때 상부의 무궤도탈선과 그 부당한 지시에 唯唯諾諾(유유낙낙)하게 순종하는 무기력한 학교당국자에 대해 우리들 학부형 입장으로 분개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어떤 시위나 대회라도 그 시위하고 호소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철저히 인식하고 심중에서 우러나는 공명의 자의식이 發露(발로)되어야 그 표현에도 나타나고 시위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고 대회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지, 아직 십오륙 세 정도의 미숙한 학생들에 어찌 그러한 자각을 기대할 수 있고 무슨 효과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대외적 시위라면 외국인이 볼 때 한국민의 조숙에 놀라기보다 관제동원임을 먼저 깨닫게 할 것이요, 국내적 궐기라면 대회의 효과에 앞서서 학부형들의 반감이 먼저 그 대회를 욕할 것이다.
문교행정이 도지사의 率下(솔하)에 있는 것을 기화로 道(도)당국이 각종단체의 행사에 만성적으로 이러한 학생동원의 弊風(폐풍)이 만연한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야 할 문제라고 본다. 중고등학생의 동원은 그 학도들의 교육을 위한 행사 즉 옵저버 격으로 참가하여 그 대회나 행사의 의의를 실습할 수 있는 동원에 한하여 참가토록 하고 其外(기외)는 일체 동원 못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끝으로 학교당국자가 인과적인 '상부지시순종'의 태도를 버리고 부당한 명령이 있을 때는 결속해서 道(도)당국이나 교육구청에 그 非(비)를 건의할 수 있는 노력과 學徒愛隣(학도애린)의 성의를 보여 달라는 것을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다.
▷出迎(출영):마중.
▷殘暑(잔서):늦여름의 마지막 더위.
▷暴陽(폭양):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唯唯諾諾(유유낙낙):명령하는 대로 언제나 공손히 승낙함.
▷發露(발로):겉으로 드러남.
▷率下(솔하):거느리고 있는 부하.
▷弊風(폐풍):나쁜 풍습.
▷愛隣(애린):이웃을 사랑함.
최석채(崔錫采.1917~1991)
언론인. 경북 김천 출생. 일본 중앙대 법학부 졸업. 1955~1959 매일신문 편집국장, 주필. 1981~1987 매일신문 명예회장.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가 뽑은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es) 50인'에 선정.
1955년 9월10일 대구 거리는 중고등학생들로 가득 찼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 정치인 임병직 대사 대구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강제 동원된 학생들이었다. 매일신문(당시 대구매일) 주필이던 최석채 선생은 9월13일자 사설에서 관료들의 비뚤어진 출세욕과 잘못된 풍조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서슬 퍼런 정권에 억눌려 지내던 독자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명문이었으나 대가는 컸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신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자유당 정권이 탄압의 빌미로 삼은 것. 이튿날 오후 4시25분 자유당 경북도당 감찰부장 등 20여 명의 청년이 신문사를 습격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각종 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한국 언론 자유 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9.14 대구매일신문 테러사건'이다. 경찰은 최 선생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으나 이듬해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돼 언론의 승리로 사건이 종결됐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