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박연숙 作 '철쭉꽃, 길을 잃다

철쭉꽃, 길을 잃다

박언숙

삼 년 전 봄에 꽃망울이

가득한 철쭉 몇 포기 담장 밑에 심었다.

봄 내내 자지러지게 흩날리던 꽃무더기

작년 봄에도 올 봄에도 기다려도 보지 못했다.

탱탱하게 꽃눈 채워야 될 겨울 동안

날마다 담장을 기웃거리는 저 놈의 가로등

밤낮 마주보고 정분나서는

봄이면 뱃속을 비운 잎들만 너풀거린다.

철쭉 저것이 질펀한 잠자리도 한번

못 가져 보고 훤히 날밤만 세웠던 게다.

어김없이 오늘도 가로등은 어둠을

쫓아내고 벌겋게 뜬눈으로 밤을 지킨다.

무정자증의 사내, 불 꺼진 침실에서는

푸근히 잠 한 숨 자지 못하겠다고

벌떡 벌떡 일어나며 밝은 밤을 보챈다.

매미가 쩡쩡대는 목쉬는 밤이 있고

그 속에서 밤잠을 못 이루는 시간이 흔들리고 있다.

불감증으로 밤의 깊숙함을 모르는 철쭉에게서

이런 저런 소문들만 무성했던 봄도 떠나가고 있다.

밤은 밤답게 어두워야 하고 낮은 낮답게 밝아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문명은 밤을 가로등으로 낮처럼 밝힌다. 밤과 낮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 문명에 의해 무너졌다.

봄이 되어도 밤을 빼앗긴 철쭉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 뱃속을 비운 잎들만 너풀거린다'. 결국 밤을 낮처럼 밝힌 도시의 봄은 '질펀한 잠자리도 한번/ 못 가져 보고 훤히 날밤만 세'우다가 꽃 하나 못 피워 보고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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