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 박구재 지음/ 황소자리 펴냄
지금 우리에게 '돈'은 즉물적 대상이다. 열망과 질시, 한숨과 동경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화폐만큼 각국의 정치적·문화적 아우라가 깊게 드리워진 물건도 드물다.
화폐는 한 나라 역사와 경제 그리고 기술력의 결정체이며, 국가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무언의 외교관'이다. 더구나 가로 15cm, 세로 7cm의 작은 지폐 속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꿈꾸며 세상을 빛낸 매력적인 인물들의 삶이 녹아 흐르고 있다.
이 책은 지폐 속에 등장하는 전세계 22개국 39명 인물들의 드라마를 씨줄로, 화폐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들을 날줄로 한다. 이를테면 '지폐로 보는 인물세계사'이며 '화폐로 읽는 테마 문화사'인 셈이다.
유럽에서는 예술가들을 지폐 속에 무더기로 등장했다. 서양문명사의 중심축이었던 유럽이 유로화로 통합되기 이전, 각국이 발행한 지폐에는 서양사를 풍미한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어린왕자처럼 하늘로 사라진 생텍쥐페리, 후기 인상파의 거장 폴 세잔, 거대한 철의 교각을 세운 구스타프 에펠, 작곡가 드뷔시 등은 예술의 나라 프랑스 지폐를 장식한 주인공들이었다.
2천년 로마제국의 적통을 자부하는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이룬 라파엘로와 작곡가 벨리니, 조각가 베르니니, 아동교육의 창시자 마리아 몬테소리, 증기선을 발명한 마르코니를 지폐 모델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미국의 지폐는 정치인 일색이다.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과 잭슨 그리고 그랜트는 역대 대통령이고, 해밀턴과 프랭클린 역시 정치에 발을 담갔던 인물들이다. 남아메리카 지폐는 운동권 인사들의 집합소이다.
쿠바의 경우 체 게바라와 안토니오 마세오 등 쿠바 독립전쟁을 이끈 운동가들이 등장한다. 베네수엘라 지폐 역시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를, 멕시코는 21세기 좌파 반군 게릴라 '사파티스타'의 정신적 지주인 사파타를,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민족운동가 호세 산 마르틴의 초상이 들어가 있다.
아시아의 지폐 속 인물초상은 비교적 단조롭다. 중국 지폐는 마오쩌둥으로 모델을 단일화했다. 타이완 지폐에는 쑨원과 장제스의 초상이 들어가 있다. 모든 지폐에 단일 모델을 쓰는 나라도 많다.
태국은 푸미폰 국왕을, 베트남은 호치민을,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를 모든 지폐의 앞면에 등장시킨다. 북한의 고액권에는 모두 김일성 주석의 초상이 들어가 있다. 아시아의 문화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장 격조있게 그려낸 지폐는 단연 우리나라 돈이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거두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1천원권과 5천원권을 장식하고 있으며 '신기에 가까운 과학적 문자'라고 세계인들로부터 칭송받는 한글 창제자 세종대왕이 1만 원권 지폐에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지폐 속 인물들이 꿈꿔온 세상, 그들이 세상과 관계 맺은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화폐에 얽힌 수많은 사건과 사고, 흥미로운 일화들은 '돈'의 문화적 기능과 역사 그리고 그 색다른 교양을 충족시키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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