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열린우리당 대구시장 예비후보는 대구 개혁 진영의 기대주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에다 시민운동가, 재선의 남구청장, 대구시장 출마, 환경부 장관 역임 등 척박한 대구 정치 지형에서 이채로우면서도 화려한 경력을 지녔다.
그는 연약해 보인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안경 너머의 눈매는 간단케 보이지 않는다. 남구청장 시절, 온갖 회유와 협박을 무릅쓰고 남구 양지로 속칭 '영계골목'에 몰려 있던 140여 개 퇴폐업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는 평을 이때 듣게 된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지만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서 옥산초교를 다닌 그는 당시 공부와 운동 등에서 재능을 발휘한 소년이었다. 전교 1등을 뺏기지 않던 그는 4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 2년 동안 선수로 활동했다. 어렵던 시절 옥수수 빵과 우유를 더 준다는 이유로 야구부에 들어갔지만 경북중에 합격할 만큼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였다는 이유로 학교 측이 6학년 때 야구를 그만두게 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야성적인 기질은 경북고 1년 때부터 드러났다. 당시 경북대 운동권이었던 이강철(현 대통령 정무특보)은 경북고 학생들을 상대로 싹수(?)가 보이던 후배를 찾던 중 이재용을 눈여겨 봤다. 대학시절 잇따라 제적을 당했고 이후 정치적으로 비주류의 길을 걷게 된 뿌리가 시작된 셈이다.
8년 만에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뒤 개업의를 했던 83년부터 그는 북구 침산동 등지 빈민가를 다니며 무료 진료 운동을 벌었고 87년 5월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개인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88년 전국 조직인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를 만들었고 91년 대구환경운동연합 초대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95년 남구청장에 당선됐고 재선을 거쳐 2002년 무소속으로 대구시장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현 정부 들어 환경부 장관(2005년 6월~2006년 3월)으로 발탁됐다.
그의 삶에서 연극은 빼놓을 수 없다. 75년 제적을 당해 대구로 내려온 뒤 중앙도서관 등지에서 연극이론서를 탐독했고 이를 바탕으로 86년부터 10년간 극단 '처용'을 운영했다. 94년 연극협회 대구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연극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한 방법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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