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북면을 출발해 경북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보면 희한하게도 딱 절반을 자르는 지점에 포항과 영덕의 경계 지경천이 있다. 울진 북면이 강원도에서 뒤늦게 경북으로 편입됐고, 행정구역을 나눌 때 거리를 쟀을리도 만무하건만 울진 영덕의 해안선 길이를 더한 것과 포항 경주의 해안선을 더한 길이는 거의 같다.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다. 영덕 쪽은 남정면이고 포항 쪽은 송라면이다.
10m 남짓한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영덕의 끝집도, 포항의 첫 집도 횟집이다. 돌담 아래서 봄볕을 쬐고 있던 김 씨 할머니(자신은 "그냥 김 씨 할매라 캐라. 이름이 어딨노?"라고 했다.)는 "정치 한다꼬 저그(행정가)가 잘라놨지 우리사 그냥 그대로 바닷바람 쐬면서 어깨 맞대고 사는거 아이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포항)는 지경1리고 저쪽(영덕)은 부경2리인데, 그냥 한 마실같이 살지 따질 게 뭐 있노?"라고 했다.
몇 가지를 더 묻자 할머니는 되레 쏘아붙였다. "동해가 우쨌다꼬? 밸놈의 소리 다 듣겠네. 바다믄 그냥 바다지, 동해는 머고 서해는 또 머꼬? 그라믄 남해는 어데서 어데까지라 카드노?" 이들에게 바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삶의 터전일 뿐 경계짓고 구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의 말에서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정말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해이고 남해와 서해의 경계는 어딜까? 꼬박 하루 동안 이 문제에 매달렸으나 똑 부러지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가 주업무인 해양수산청을 비롯해 해양경찰서, 국토지리원, 해양조사원 등 어느 한 곳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가 없었고 같은 기관 안에서도 이쪽 저쪽 부서로 전화만 돌리다 나중에는 "왜 이 쪽으로 전화했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나마 해양조사원 해도과 관계자에게서 가장 근사치 같은 "북쪽 시점(始點)은 북한 땅이라서 모르겠고 남쪽 종점(終點)은 부산 해운대 오륙도 앞바다까지로 추측될 뿐"이라는 답을 얻는데 하루해가 걸렸다. 그것도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정확한지는 나도 모르겠다."는 단서를 붙인 것이었다.
결론은 우리 정부안에 '동해는 없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일본이 툭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한일어업권 협상에서 꽁치어장, 대게어장, 복어 어장을 일본에 다 내주고도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와 해양조사원 '추측'을 합치면 동해해안선은 함경북도 나선시 선봉군 우암리에서 부산 오륙도 앞 성두마을까지 약 2천㎞ 거리다.
개념없는 관리 때문 탓은 아니겠지만 송라면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띄는 것은 곳곳의 훼손 현장이었다. 골곡포(骨谷浦)라는 옛이름을 가진 화진해수욕장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왜군이 조선 의병들에게 죽고 그들의 시신을 묻은 '썩은 숭이내'라는 집단 무덤이 80m 길이로 남아 있었고 해방 직후까지도 그 흔적들이 예사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은 또 국토 최남단 해당화 군락지로 해마다 5월이면 보라색 꽃이 장관을 이뤘으나 벌써 훼손돼 지금은 그저 몇 포기만 남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화진해수욕장에서 자동차 한 대가 어렵게 통과할 수 있는 해안도로를 타고 조금만 더 내려오면 조사리(祖師里) 바닷가에 길게 드러누운 형상을 한 바위 하나가 있다. 일명 아비 용바위다. 이 바위는 바로 옆자리 어미 용바위와 함께 나란히 누워 많은 사람들의 득남소원을 들어주고 있다. 헌 어구를 손질하던 할머니는 "이 방구(바위) 앞에서 빌면 아들 한둘 낳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는 말을 어릴 적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십수 년 전에 누군가가 어미용의 머리 부분을 떼어 가버리고 몸체는 묻어 버렸다. 지금은 홀아비 신세가 된 아비용마저 신체의 일부분을 시멘트 바닥에 묻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오염도 저그(도시민)가 시켰고, 훼손도 저그가 다 시켜놓고 가끔 한번씩 나타나서는 다 망쳐놓았다고 욕을 해댄다."며 바깥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포항시청 공보담당 이광희 씨는 "울진과 영덕 앞바다는 삶터이자 생활공간으로 푸른 빛을 띠지만 포항 해안은 전쟁터로 온통 피빛이라는 사실을 취재기간 내내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포항으로 접어들자 이정표며 해병대 휘장, 심지어 해당화 꽃잎까지 유난스레 붉은 색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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