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엄마'展 여는 대구대 김태연 교수

"어머니가 떠나신 지 33 년 만에 비로소 마음 놓고, 드러내놓고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철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7살짜리 동생까지 두살 세살 터울의 동생들을 줄줄이 맡아서 키우느라 저 자신은 돌볼 틈도, 엄마를 탓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실 적 어머니께 배운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힘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유품과 아련히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모두 모아서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해드리면서 동시에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더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올해 갑년(甲年, 60)을 맞은 김태연 대구대 교수가 대구 동아쇼핑 10층 미술관에서 지난 3일부터 9일까지 '우리 엄마'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는 중년층 이상이라면 누구나 가졌음직한 갖가지 추억들로 가득차있다. 중년의 남성들이 '우리 엄마'에 대해 맺힌게 많은지 구경하면서 울고 가기도 한다.

"제 치마꼬리를 붙잡고 놓지 않던 막내까지 결혼시키고 나니 저는 빈털털이가 됐어요. 항상 융자를 내어서 갚으면 살다보니 집 한 칸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영천 산골에 작은 콘테이너 집을 지어서 살 수 밖에요."

딸을 많이 낳고 마흔 일곱에 훌쩍 떠나버린 엄마가 타계하기 사흘 전, 김교수에게 전한 도끼 부적도 전시장에 나와있다. 3개의 작은 쇠도끼가 나란히 달린 이 부적을 주면서 엄마는 "혹시 동생들이 시집가서 딸을 내리 낳거든 삼년간 이 부적을 차고 다녀라고 그래라." 바로 밑의 동생들이 딸을 계속 낳을 때는 먹고 살기 바빠서 잊어버렸다. 다섯째 동생이 딸 2을 낳고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쓰는 걸 보면서 도끼 부적이 떠올라서 차게 했는데, 아들을 낳았다.

"혼자 살면서 연말이 되면 유난히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울면서 전시회를 생각하게 됐어요. 엄마가 가르쳐준 지화도 만들고 머리카락을 비벼서 꽃도 만들었어요. 엄마는 바닷속에도 꽃이 난다면서 조개로 꽃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렇게 엄마 어깨 너머로 배운 지화는 김 교수를 한국에서 독보적인 지화 연구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국내 유일의 지화박물관도 영천에 차려놓았다.

"찬 바람이 불면 엄마는 가래떡을 자주 하셨어요. 그때는 냉장고가 없어서 장독대에 가래떡 소쿠리를 두었는데 밤새 눈이 내려 보얗게 덮이기도 했는데, 이튿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떡을 썰면 한 바가지씩 나눠주시더군요."

북망산천에 묻혀있는 엄마를 이제야 떠나보내면서 진혼굿(3일, 무형문화재이자 강신무인 김금화씨의 신딸 이해경씨) 지화 만들기(5일)에 이어 살풀이(8일 3시 4시 5시, 이방자)까지 곁들이고 있는 김 교수는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의 좋은 일, 나쁜 일을 다 털어내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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