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은 유난히 날씨 변덕이 심하다. 초여름 날씨다 싶어 반팔 옷을 꺼낼라치면 가을날씨마냥 오슬오슬해져서 장롱 속 긴 팔 옷을 다시 꺼내게 된다.
그래선지 올 봄은 좀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년 같으면 빨리 져버려 지금쯤 "천지에 자취도 없어"졌을 모란이 아직 끝물 몇 송이를 달고 서있다. 도드라진 황금 꽃술이 하도 매력적이라 가까이 코를 대니 옅은 향내가 풍겨난다(모란엔 분명 향기가 있다).
입하(立夏)도 지났다. 계절의 수레바퀴는 봄의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느새 봄이 끝나가려한다니 하아,참….
그러고 보니 송화(松花)의 계절이다. 솔가지 새순마다 올록볼록한 고것들이 열매처럼 솟아나 한창 익어가고 있다. 산자락 솔숲에선 벌써 껍질을 벗어버린 송화가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참이다. 5월의 훈풍에 실려 노오란 송홧가루가 하늘하늘 허공에 흩날리는 장면은 한겨울 백설의 윤무와는 또 다른 늦봄의 비경(秘景)이다. 어느 애처로운 눈 먼 처녀를 떠올리게 해서인지 더욱 가슴에 젖어드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박목월 시 '윤사월')
솔가지마다 부러져라 많이도 달린 송화는 빨리 배 고파지는 봄날, 시골 아이들의 좋은 주전부리 감이었다. 연둣빛이 감도는 송화를 손으로 쓱 훑어 한 입 넣고 우물거리면 쌉쌀한 솔내음과 함께 달큼한 뒷맛이 먹을 만했다. 송화가 노랗게 익어 푸석푸석해져서 마침내 꽃가루가 터져나올 때쯤이면 엄마들은 큰 그릇을 받쳐들고 송홧가루를 살살 털었다. 큰 자배기에 넣고 물을 갈아주며 떫은맛을 없앤 뒤 꿀과 버무려 다식도 만들고, 송화차를 즐기기도 했으며, 약으로도 애용했다.
요즘은 도시에도 소나무가 관상용으로 많이 심어져 있어 봄이면 자동차며 어디며 송홧가루가 내려앉은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비라도 한바탕 뿌린 날이면 고목 길을 노랗게 물들이며 흘러가는 낙숫물도.
솔숲마다 노란 안개 피어오르는 이맘때면 배고픈 꽃 진달래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 부르지 않던 꽃, 송화가 있던 풍경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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