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탕주의'는 점잖은 말은 아니지만 널리 쓰이고 있다. 무슨 일이건 '한방'에 해결하려고 허황한 꿈을 꾸는 사람에게 비난조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그 '허황한 꿈'이 이루어지면 그땐 뭐라고 할 건가? 그땐 '한탕주의' 대신 '모험주의'라는 말을 써야 하는가? 잠시 부정적인 어감을 잊고 한탕주의는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미국은 전형적인 한탕주의 국가다. 국가의 성립 자체가 그랬다. '아메리칸 드림'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미국식 한탕주의'가 적합하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강대국들은 모두 한탕주의 속성이 강한 나라들이다. 투기와 도박이 가장 크게 많이 일어난 나라들의 이름을 꼽아보시라. 결코 미국, 영국,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은 퇴조하던 한탕주의를 다시 불러 들였다. 아니 이전의 한탕주의보다 훨씬 더한 한탕주의를 만연시켰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인터넷 벼락부자들을 보라. 한국에서도 수많은 인터넷 벼락부자들이 탄생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한탕주의에 성공할 때에 재미와 감동을 느낀다. 부잣집 자식이 출세하는 게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출발해 모험과 도박성 결단을 일삼으며 성공할 때에 재미와 감동이 가능해진다.
한탕주의는 그 어떤 문제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역동성을 입증해주는 증거로서의 의미가 있다. 문제는 역동성 과잉이다. 한탕주의의 일상화다. 작은 일을 소중히 하면서 평소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나갈 생각은 않고 적당한 기회를 잡아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심리가 우리 사회 전 분야에 만연해 있다.
잘 생각해보면 그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삶의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대인관계에서도 그렇다. 누군가가 문제의 소지가 있는 행동을 하면 그때그때 적절한 대응을 하면 좋을텐데 그걸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가 '건수'를 잡아 일시에 폭발시키곤 하다. 화끈해서 좋긴 한데,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설사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응징의 수위가 너무 높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우리가 대화와 타협에 서투르거나 그걸 귀찮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중요한 건 한탕주의에 친화적인 사회적 토양이 정치와 행정의 한탕주의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행정이 평소 작은 문제들을 성의있게 다루면서 민생을 보살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외면하면서 문제가 악화되는 걸 방치해 둔 채 나중에 그걸 한방에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도처에 널려 있다.
더욱 비극적인 건 바로 그런 토양 때문에 정치·행정의 한탕주의가 자주 '개혁'의 증거인 양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홍보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온갖 한탕주의 공약이 난무한다. 유권자들은 그간 워낙 속아온 탓에 그게 다 '뻥'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려한 공약이 없는 후보들보다는 그런 '뻥'을 선호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 밀도 때문일까? 아파트·자동차·집무실은 크고 넓을수록 좋고 담론은 거대할수록 좋다. 작은 일들을 소홀히 하고 거대담론을 좋아하는 건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갈등은 성장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갈등을 빚는 당사자들 모두가 한탕주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 때론 거창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긴 한데, 한탕주의가 워낙 만연하다보니 크게 말하는 사람과 집단일수록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하긴 신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탕주의는 시대정신이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영광의 비용으로 생각하는 게 속 편하겠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생각은 해보자. 이제 우린 한탕주의가 미덕일 수도 있었던 초고속성장의 단계는 지났다. 차분하게 내실을 다져가야 할 때다. 한탕주의에 대한 미련을 접고 작은 일들을 중요시해야 한다. 꾸준한 노력으로 성과를 거두려는 삶의 자세를 연습하는 동시에 그런 식으로 일하는 공직자를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겐 '벼락공부'하지 말라고 하면서 어른들은 왜 그러는가?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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