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자 주부인 조모(33·달서구 죽전동)씨는 주말이면 서문시장 동산상가를 찾는다. 조씨가 동산상가 마니아가 된 지는 벌써 10년째. 당시 아울렛도 없던 시절, 보다 저렴한 가격에 유명 브랜드 제품을 사려던 것이 목적. 카피 제품이나 태그(Tag)를 떼고 출시되는 B급 제품(외견상 흠집이 안보이는)을 50% 이상 싼 값에 산 뒤 백화점 등에서 똑같은 제품을 찾아내 '저가 쇼핑'의 성취감을 즐겼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조금 달라졌다. 종전에 옷 고르는 기준이 브랜드-디자인-가격이었다면 지금은 브랜드가 맨 뒤로 쳐졌다. 오히려 낯선 브랜드라도 최신 유행 감각에 맞고 가격대만 적당하다면 주저없이 옷을 구매한다.
"결국 브랜드 제품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똑같은 디자인의 옷이더군요. 그보다는 적당히 톡톡 튀는 최신 유행을 좇는게 훨씬 재밌어요. 가격도 브랜드만 고집하는데 비해 훨씬 저렴하죠. 주위 사람들의 평도 좋아요."
조씨는 '프라브(PRAV)족'이다. '부가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Proud Realisers of Added Value)을 뜻하는 신조어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용어는 합리적 소비와 자신만의 가치를 중시하는 '실속파'를 가리킨다. 고소득층 유명 연예인들이 저가 소매점이 몰려있는 거리에서 10파운드(약 2만 원) 안팎의 패션 물품을 한가득 산 뒤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 바로 이 프라브족의 전형적인 사례로 자주 소개된다.
이들에게 화두는 브랜드가 아니다. 최신 유행과 싼 가격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그 옷 멋있다. 어디서 샀니? 얼마나 줬어?"라는 질문을 은근히 기다린다. 동시에 상대방이 예상한 브랜드와 가격대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낀다. 시장 또는 구제 상가에서 단돈 몇 만 원에 구입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의 구매감각을 자랑한다.
프라브족은 구찌, 버버리, 프라다, 샤넬 등 브랜드에 매몰돼 사치스레 꾸미는 '블링 블링'(bling bling)에 대한 거부감인 동시에 자신만의 멋을 창조한다고 하지만 결국 싼 제품만 추구하는 '차브'(chav)에 대한 반발이다. 프라브족에게 싼 가격은 최신 유행이나 톡톡 튀는 개성이 남들로부터 담보된 뒤에 따라오는 일종의 후(後) 보상제인 셈이다.
구제상가를 찾는 심리도 비슷하다.
몇 해 전부터 '빈티지'(색이 바랬거나 구겨진 중고 의상을 선호하는 패션 경향)이 유행한데서도 일종의 프라브족 심리를 엿볼 수 있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스플레이와는 거리가 먼 구제상가. 하지만 프라브족들은 광산에서 보석을 캐내는 심정으로 구제상가의 옷더미를 뒤진다. 비록 남의 손을 탄 제품이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멋에 걸맞고, 거기에 덧붙여 가격까지 남들이 놀랄만큼(이 점이 중요하다) 저렴한 옷을 찾아낸다면 프라브족은 희열을 느낀다.
대구의 대표적인 구제시장인 일명 '도깨비 시장'을 찾는 대학생 손은아(23)씨는 "여전히 빈티지 패션의 강세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구제품을 뒤지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흔히 접할 수 없는 디자인과 브랜드 제품을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손씨는 옷뿐 아니라 패션 소품들도 구제시장에서 해결하고 있다.
발품 대신 손품을 파는 프라브족도 있다. 인터넷 쇼핑몰을 부지런히 오가며 경매 또는 공동구매를 통해 알뜰함을 추구한다. 최근엔 패션에서 벗어나 생활용품, 인테리어까지도 자신만의 희소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런 경향에 맞춰 유통업체들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유명 브랜드 유치보다는 희소성에 무게를 두고 매장을 재편하고 있다. 동아백화점의 대응은 눈길을 끈다. 미국 직수입 브랜드인 '핫키스'를 통해 다른 유통업체 상품과는 차별화를 추구하고, 고가 유명 브랜드를 제외한 다양한 편집매장을 구비해 프라브족의 입맛에 부응하고 있다. 프라브족이 즐겨 찾는 '핫키스' 매장의 경우, 일단 가격대가 10만 원 선으로 일반 의류뿐 아니라 란제리, 수영복, 구두, 액세서리 등을 취급하는 토탈 브랜드다. 도발적이고 개성있는 트렌드를 추구하면서 미국에서도 섹시 로맨틱 캐주얼로 호평받고 있다.
아울러 수성점·본점에 있는 중가 수입의류 막스앤스펜서, 수성점내 수입편집매장 '라띠'(프라다·구찌·페레가모 등), 본점내 수입편집매장인 웨어펀(아이그너·겐조 등), 수입편집골프(먼싱웨어·블랙앤화이트 등)가 포진해 프라브족들의 입맛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이들 편집매장의 장점은 백화점이지만 아울렛 형태를 취한다는 것. 병행 수입제품도 취급하기 때문에 브랜드 제품을 최저 30%에서 최고 70%까지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동아백화점 쇼핑점 여성바이어 김기백 대리는 "앞으로 프라브족을 겨냥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아이템 발굴이 유통가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매장 운영도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프라브족의 입맛에 맞춰 할인 쇼핑코너를 신설·확대하는 추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