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 (17)'고래의 계절' 5월 포항 바다

간 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조그만 예쁜 고래 한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가요 '고래사냥' 중에서)

해마다 5월이면 포항 앞바다는 고래의 나라가 된다. 때로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파도 위를 불쑥 솟아 오르고, 어떤 녀석들은 보는 이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잔잔한 파도위에 드러눕기도 한다. 그래서 어민들은 "고래는 바다를 닮았고, 파도를 닮았고, 갯가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고들 한다.

울릉도와 포항을 수시로 오가는 배석오(48·울릉읍 도동리) 씨는 "여객선과 나란히 달리는 돌고래떼를 보면 삶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솟아 오른다."고 했다.

고래는 매년 2월 서해안 어청도에서 물길을 따라 한반도 연안 여행길에 오른다. 파도에 몸을 싣고 지느러미를 흔들며 남해를 거쳐 4월쯤 울산 장생포에 이르고, 어린이 날을 전후해서는 포항 장기와 구룡포, 호미곶 앞바다에 그리고 영덕 강구를 지나 8월쯤 울진 죽변에 다다른다.

고래떼가 나타나기 전에는 '징조'가 있다. 동해바다에서 곤쟁이(낚시 미끼로 많이 쓰는 새우의 일종)가 나타나고 오징어와 청어, 멸치떼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는 고래시즌의 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주 먹이인 이런 어종들을 노리고 고래가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죽은 고래 위장속을 보면 95% 가량이 곤쟁이다. 그 곤쟁이가 매년 이맘때쯤이면 포항 앞바다에 지천으로 몰려든다.

포경어업이 금지되면서 바닷가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지만, 1980년대 초만 해도 고래가 숨쉬는 동해바다는 노랫말에서 나오는 것처럼 신화의 산실이었다. 고래잡이로 생계를 이었던 어민들이 거의 세상을 떠나 포경선 승선경험자로는 막내격인 장서구(51·구룡포 4리) 씨는 "고래떼를 따라 어청도-장생포-구룡포-울릉도를 오가다 보면 반년 세월이 번개처럼 지나갔다."고 회고했다.

"포경선 탔던 사람들은 다른 배를 못타요. 힘과 스피드, 순발력 등 왠만한 프로 스포츠 선수들과 맞먹는 기량을 갖춰야 배를 탈 자격이 주어졌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돈도 돈이었지만 포경선에서 스릴과 멋을 즐겼던 것 같아요." 장 씨는 8 년여에 걸친 자신의 포경선 선원 시절을 '신화처럼 살았던 때'라고 했다.

포경선은 배 크기와 무관하게 승선원은 11명이 한조를 이뤄 조업을 하는게 보통이었다. 작살을 쏘는 포수를 제일로 쳤고 선장과 갑판장, 각 2명씩의 1등 갑판원과 2등 갑판원, 조리장, 해부장, 기관장, 조기장이 손발을 맞췄다. 각각의 역할이 있었지만 귀신같이 고래를 잘 찾아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의 인기도 명포수에 못지 않았다.

고래에는 돈도 따라 다녔다. 선원들의 월급은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인센티브(성과급)가 보통 아니었다. "고래를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는 발견료라고 해서 월급의 15%를 얹어줬고 1마리를 잡을 때마다 월급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참 재미있었지요."

돌고래는 까불고, 밍크는 점잖고, 참고래는 순하다. 밍크고래 1마리 값은 돌고래 10마리와 맞먹고 참고래 1마리는 밍크 10마리와 맞먹을 정도였다. 다만 요즘은 숨구멍을 통해 바닷물을 분수처럼 수십m씩 뿜어 올리는 참고래를 만날수가 없다는게 갯가 사람들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20t이 넘는 참고래 1마리를 잡으면 그것이 곧 신화였다."고 말하는 장 씨는 배에서 내린 지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신화속에서 살고 있는 듯 했다.

요즘 어민들은 고래를 '바다의 로또'라고 부른다. 밍크고래 한두마리만 걸려 올라오면 수천만 원을 족히 챙길수 있으니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게다가 고래는 암수가 짝을 지어 움직이는 탓에 한마리가 걸려들면 틀림없이 그 근처에서 적어도 하루 이틀 안에 한마리가 더 잡혀온다는 것도 경험에서 얻은 원칙이다.

로또당첨 유혹에 빠져 혼획(우연히 그물에 걸려 드는 것)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작살 등으로 무장한채 불법 고래잡이에 나섰다가 구속되는 어민들이 늘고 있는 것은 신화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비극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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