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단일기] 가르치며 배우며

며칠 전 퇴근할 무렵 뜻밖에 몇 해 전 여고에서 근무할 때의 졸업생 두 명이 찾아왔다. 한 명은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선생님이고, 한 명은 대구에서 초등학교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기다리는 예비 선생님이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이 이제는 어엿한 교사로 함께 교단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며, 요즘 자신들이 사는 모습, 학창시절 친구들 이야기, 함께 공부했던 선생님 이야기, 수업 시간 인상적이었던 일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발령을 기다리는 예비선생님 졸업생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대학입시학원에서 재수하던 시절 힘들 때마다 내가 들려주었다는 눈 내린 겨울날의 수업 시간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대학 4학년 때의 어느 겨울날, 하얀 눈이 내리자 여학생들이 강변으로 눈 밟으러 가자고 교수님을 졸랐다. 우리는 강변에서 교수님과 어울려 눈싸움을 하고 놀다가 어부집이라는 선술집에서 매운탕을 끓여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 부르며 놀다 저녁나절에 다시 강변을 걸어 학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때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저 쪽까지 누가 가장 똑바로 걸어갈 수 있나? 시합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술이 취한 우리는 호승심에 서로 똑바로 걸어보겠다고 애를 썼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여 뒤돌아보았을 때는 발자국이 하얀 눈 위에 어지럽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한사람의 발자국만 한가운데를 꿰뚫고 똑바로 이어져 있었다. 누가 뭐래도 장원 감이었다. 교수님이 어떻게 똑바로 걸었는지 물었다. 친구는 한번도 눈을 떼지 않고 처음에 정한 목표점을 향하여 걸었다고 했다. 우리가 운동장에 물주전자로 선을 그을 때 목표점을 정하고 물을 쏟으며 달리듯이……. 그러자 교수님께서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며 '우리의 삶도 목표점을 정하여 매진하면 비틀거림이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몇 해 전 수업 시간에 우리반 학생들에게 들려주었을 그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아마 눈 내린 날 여학생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을 것이고, 낭만이라고는 별로 없는 나는 기억 저쪽으로 묻혀가던 눈 내린 날의 대학 시절 추억 한 토막을 이야기했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추억 한 토막이 대학 수능 성적에 휩쓸려 대학 진학을 앞두었던 한 학생에게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다시 불러 일으켰고, 대학입시학원에 등록하여 나태해지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한 사람의 힘든 삶을 받치는 지렛대가 되었다니...

이제 교사 임용을 앞두고 선생님의 모습이 문득 보고 싶어 찾아왔다니... 예비 선생님은 훗날 학생들에게 나의 교수님께서 내게 해주신,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준 그 눈 내리는 날의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그 날 지식이나 주입시켰던지, 아니면 값어치 없는 이야기로 웃고 지났더라면 오늘과 같은 교사로서의 보람은 못 느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대학교수님이 생각났다.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준, 이제는 정년퇴임을 하신 은사님께 전화라도 걸어서 눈 내린 날 강변에서 똑바로 걷기의 가르침을 받은 일을 나도 말씀 드려야겠다.

이호근(성서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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