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18)동해는 고래바다

1996년 6월 포항 앞바다에 국립수산진흥원(현 수산과학원) 시험조사선 1척이 떴다. 이 배에는 우리나라 고래연구의 창시자격인 김장근 박사 등 연구원 몇 명과 신문, 방송사 기자들 몇몇이 탔다. 배는 출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밍크고래, 큰머리고래, 낫돌고래, 참돌고래 등이 유유자적 헤엄치는 구역에 다다랐고 모두들 "우리바다에 고래가 돌아왔다."고 흥분하고 감격했다. 그날 언론들은 일제히 '고래귀환'을 톱기사로 다뤘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고래는 우리 바다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래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김 박사는 "당시 '70년 만에 돌아온 고래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실제는 70년 만에 공인기관이 고래를 공식 확인했던 것"이라고 바로잡았다.

한민족은 일본, 에스키모인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고래고기를 먹는 민족이다.

그 역사는 선사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다. 바다에서 직선 거리로 20㎞나 떨어진 강가 암벽 그림에는 북방 긴수염고래가 물을 뿜기도 하고 혹등고래와 귀신고래가 있고 새끼를 거느린 어미고래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향고래, 범고래, 들쇠고래, 돌고래의 그림이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정확하게 묘사돼 있다. 더구나 그것이 선사인들이 석기나 청동기로 바위를 찍고 갈아서 새겼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기록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고래기록의 전부다. 고래고기를 먹으며 고래와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더구나 1800년대 후반부터는 고래잡이를 생업으로 해왔으면서도 우리 문헌 어디에도 고래에 관한 학술기록이 없다. 1996년 조사선이 나서면서 작성한 것이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구룡포와 함께 한국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울산 장생포에 고래연구소(소장 김장근)가 문을 열면서 비로소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지난 9일 포항 송라면 바닷가에서 귀항한 어민 김모(56) 씨가 "바로 앞에까지 고래떼가 몰려 오는 걸 보니 고래잡았다는 기사가 잇따라 나오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고래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취재가 이어지면서 김 씨의 말은 놀랍게도 적중했다.

지난 16일 오전 6시 30분쯤 영덕 남정면 부경리 동쪽 3.6km 해상에서 선장 강모(44) 씨의 정치망 그물에 걸려 죽어 있는 돌고래 5마리가 발견됐고 비슷한 시각 남정면 원척리 동쪽 1.8km 해상에 쳐놓은 박모(54) 씨의 그물에도 8마리의 돌고래가 걸려들었다. 이들 외에도 포항, 영덕, 울진에서는 요즘 하루 걸러 한 번씩 고래잡았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다.

김장근 박사의 말이다. "포경선 선원이나 경매사들의 이야기, 어민들의 경험담 및 경험에서 축적된 예측 등은 과학적 자료보다 훨씬 정확하지만 문서로 남겨진 것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본이 고래를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는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못한 게 오늘날 바다영역 다툼에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겁니다."

우리 문화에 나타난 '고래'는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땅이름이다. 한국토지공사 지명연구위원 김기빈 박사는 "남한에만 150곳이 넘는 고래 관련 마을이름이 있다."며 "특히 고래와 친숙한 경북 동해안에 많다."고 소개했다. 이 일대가 고래의 본고장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영덕 병곡면의 '고래불'과 울진 기성면 구산리 '고래바우짬', 경주 전촌리에 있는 바위 '고랫방' 등은 고래가 많이 나타났거나, 잡힌 마을이나 지점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영덕 창포리 고래등산(鯨登), 축산면 경정리와 울진 오산리의 고래바우 등은 고래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고, '고래', '고래실', '고라실' 같이 전국 곳곳에 있는 지명은 고래기름처럼 땅이 비옥한 곳에 붙여진 것이라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포항 앞바다에 고래가 많았다는 사실은 외국인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18세기부터 고래기름을 짜서 사용했던 서구 열강들은 고래떼를 찾아 한반도 연안까지 왔는데, 고래연구소가 입수한 한 미국 포경선의 조업일지에는 '아주 많은 고래(great number of whales)', '아주 많은 혹등고래(a great many humpback whales)', '고래가 무수히 보였다(whales in sight without number)' 등의 기록이 있다.

특히 1899년 1월 13일 포항에서 조업한 일본의 한 포경선 항해일지에는 '백 마리의 귀신고래떼가 영일만에 들어와 있었다.'고 적었고 며칠 뒤인 18일자 일지에는 '영일만 동북동 20마일 정도, 사방팔방에 참고래떼가 득실, 30∼40마일에 걸쳐 고래뿐이었다. 배가 빨리 갈 때에는 고래등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고래가 배를 향해 달려오기도 했다. 그 수를 따지면 몇 천 마리가 넘어 쉽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원나라와 명나라는 우리의 동해를 경해(鯨海:고래바다)라 불렀다. 고래떼가 바다를 시커멓게 덮고 있었다면, 이쯤이면 고래바다로 충분하지 않을까.

요즘도 포항 앞바다는 종종 경해를 이룬다. 국내 연안에 살고 있는 고래는 확인된 것만 34종류나 되고 조사선을 타고 나가면 헤엄치는 고래떼가 눈앞을 가릴 정도로 대식구를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가 없을 뿐이다. 우리바다에 대한 자료가 남의 손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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