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흰장미가 가르쳐 준 행복

해마다 5월이 되면 하얀 장미가 피어 있던 그 옛날 우리 집이 떠오릅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나날이 가세가 기울어가던 그 해 봄엔 정원에 향기 가득한 흰장미가 피었습니다. 고3이었던 제겐 공납금조차 낼 수 없는 날이 이어졌고 마지막 사춘기를 보내며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 울곤 하던 날이 많아졌지요.

빚쟁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어느 날 아버지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신 어머니는 슬리퍼를 끌고 바람 쐬러 간다며 나가셨고 주방에서 술을 드시던 아버지는 꺼이꺼이 우셨습니다.

저녁이 다 되어 돌아오신 어머니는 수척해진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시며 정원에 흰장미가 만발했다고 같이 나가보자고 하셨습니다. 5월 저녁 바람결에 장미의 향기는 동네 어귀로 퍼져가고 있었고 돈 때문에 그렇게 어두웠던 집은 아무것도 모르고 활짝 웃는 아기처럼 우리 가족들을 기쁨으로 물들였습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가야 했고 이사 가던 날 가족이 다 함께 정원에서 흰장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쩌면 다시는 그런 큰 집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가족들과 동고동락한 흰장미와 함께한 저녁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그 해 봄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집을 잃어야 했던 그 봄의 고통은 장미의 향기에 묻혀 버린 듯했습니다.

김종욱(대구시 수성구 욱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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