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21)해방 민심 선점한 좌익세력

미군이 대구에 진주하기 직전인 1945년 9월 중순, 대구의 하늘엔 미군기로부터 전단(비라)이 뿌려졌다. 조선어와 일어·영어로 된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38선 이남 주민은 미 점령군의 지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미군이 진주해서 일본군을 무장해제할 때까지는 현 상태대로 일본군경이 치안을 담당한다."

'미 점령군에 복종할 의무'운운은 그렇다 쳐도, 일본군경이 치안을 담당하다니, 아무리 한시적이라지만 해방된 나라에 있을법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분개해했다. 반대로 그 때까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풀이 죽어있던 일본군경들은 이를 계기로 눈에 뜨이게 기가 살아나는 모습이었다. 타력에 의해 얻어진 해방의 환상이 여지없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자극받아 '치안대'에 소속돼 있던 대구의 일부 좌익청년들이 9월 27일 대구 최초의 '적색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미군이 대구에서 본격적인 전을 펴기 전에 자신들의 세(勢)를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 때까지는 좌우익이 서로 은인자중하며 공존하는 입장이었다. 중앙과는 달리 대구의 좌익 지도급 인사들은 과격한 주장들을 애써 자제해 온 편이었다. 그런 터에 50여명의 강경한 좌익청년들이 "자극적인 행동은 삼가 하라"는 원로들의 타이름도 귓전으로 듣고 일을 벌였다.

이들은 서너 대의 화물트럭에 나눠 타고, '조선인민공화국만세!',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등이 적힌 현수막을 앞세우고, '적기가'를 부르며 대구시가를 누볐다. 진주한 미군은 물론, 대구의 우익과 중도인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시위였다. 이 일로 대구의 정가는 단번에 대결국면으로 변모해 갔다.

그렇잖아도 이 보다 앞선 9월 8일에 '중앙건준'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경북도내의 일부 군 단위 '건준'도 덩달아 '군인민위'(郡人民委)간판으로 갈아달고 있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활동이 본격화 된 10월 이후부터 미군과 '인민위'간에는 세 겨루기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0월 16일 대구공회당에서 대구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이틀 뒤에 경상북도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인민위'는 어느새 허울 좋은 간판에 불과했다. 무력을 지닌 미군정이 유사 권력조직인 '인민위'를 원천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대구의 좌익인사들은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한 인민당이나 박헌영(朴憲永) 휘하의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합법적인 정당인의 자격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상당수가 일제하의 투쟁경력이 우익에 앞서 있었다.

그런데다 미군정의 친일관리 중용으로 민심이 이반되자, 항일 경력들을 내세워 그 반사효과를 선점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친일 고관이던 김대우(金大羽) 경북지사가 10월 초 도내 군수·과장급 전보인사를 단행하면서 친일관료들을 거의 재 등용해, 도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던 것이 바로 그런 예였다.

게다가 좌익들의 선전·선동술은 우익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민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데 탁월했다. '농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인민의 절대평등', '무산대중의 세상' 등의 구호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뒷날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던가는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과 경제난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지만, 당시의 굶주리고 순박했던 조선의 민초들에겐 그처럼 솔깃하고 달콤한 구호도 없었다.

물론 이런 구호를 퍼트리고 외친 좌익 당사자들도 온전히 거짓으로만 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들 자신들도 그런 사회를 염원했고, 반드시 실현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론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좋게 보아 그들 또한 현실의 냉엄함을 모르는, 한낱 꿈에 취한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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