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한국사람의 '마음의 고향'이라면, 미야자키는 일본인들이 죽기 전에 꼭 가보기를 원하는 곳이다. 일본 최남단 규슈지방의 온난한 기온(연평균 17℃)과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긴 일조시간으로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던 이곳은 최근 30여 개의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골프와 온천을 즐기려는 한국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미야자키에 가면 미야자키현청이 있는 미야자키시에서 서북부로 한참 떨어져(버스로 5시간) 있어 구마모토(버스로 1시간 30분)에서 오히려 더 가까운 아소산 권역의 다카치호(高天穗)를 꼭 여행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곳은 일본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전통적인 생활습속까지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일본의 속살이자, 역사적 풍경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시인 구상 선생의 2주기(5월 12일)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한일 양국 문화인들의 모임인 '그리스도폴 강의 모임'이 다카치호마치에서 한일문화교류를 여는 바람에 그곳을 방문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곳에는 일본의 정통 문화와는 달리 우리 문화를 오히려 빼닮은 풍습, 식문화와 옷문화가 남아있다. 미야자키의 난고촌이라는 곳은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문화가 꽃핀 지역이기도 하다.
다카치호에서 우선 가볼 만한 곳은 아소산 용암이 흘러내려 형성된 다카치호협곡, 천손들이 나라를 세울 곳을 살펴봤다는 구미니가오카(國見ケ丘) 자연전망대, 매일 밤 일본 건국신에 대한 찬미와 풍요를 기원하는 요가쿠라(夜神樂), 일본 개국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天照大神) 신화의 출발지인 동굴(天岩戶, 아마노이와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인공을 거부하는 천연 관광지 다카치호협곡은 상상을 불허하는 주상절리(사진1), 주상절리를 뚫고 흘러내리는 천길 폭포(사진2), 폭포가 만들어내는 깊은 소, 그를 감싸고 V자 계곡을 흐르는 청수, 신이 오르내린다는 울창한 원시림이 말문을 닫게 한다. 다카치호협곡의 일부는 보트를 타고 돌아볼 수도 있는데, 강폭이 좁은 곳을 통과하려다보면 강물까지 흘러내린 주상절리에 보트를 부딪히거나 쏟아내리는 폭포물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명승으로 지정된 이곳은 다카치호협곡에서 유일한 유료관광지인데, 보트는 최대 3인까지 탈 수 있고, 승선 요금은 1인당 500엔이다.
다카치호협곡을 둘러보는 길은 두 갈래다. 계곡을 따라 걷는 길과 관광객을 위해서 마련해놓은 투어길이 있다. 계곡길은 다카치호협곡의 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으나 비교적 험하고, 투어길은 순탄한 길이지만 안전하다. 기자는 투어길을 택했는데, 아소산이 폭발하면서 분출한 마그마가 급속 냉각되면서 형성된 다카치호협곡의 천연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산책길 곳곳에 한글로 된 안내판이 나오는데, 틀린 단어에 문법조차 맞지 않아서 아쉬웠다. 한글로 된 안내판 가운데 하나가 서있는 '기하치(鬼八)의 돌'(사진 3)은 무게가 200톤이나 되는 것으로 건국 신화의 태양신의 성질 나쁜 동생이 던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기하치의 돌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아마노이와또라는 동굴(天岩戶, 사진 4)이 나온다.
일본 개국의 시발인 천상의 신 천조대신이 힘세고 난폭한 남동생(스사노오, 사진 5)의 횡포에 화가 나서 다카치호협곡의 천암호에 숨어버리자 세상이 어두워졌다. 다급해진 800만 천상계 신들이 동굴 옆 천안하원(사진 6)에 비상소집됐다. 천조대신을 동굴 밖으로 끌어낼 방안을 찾던 신들은 묘안을 썼다. 신명나는 놀이판을 걸쭉하게 차린 것이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웃음소리가 궁금해진 천조대신이 동굴 문을 약간 여는 순간, 바깥에 대기하던 신들이 돌을 힘껏 밀어젖혀 태양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이런 건국 신화를 담은 것이 가쿠라(神樂)이다. 가쿠라는 2갈래인데, 하나는 매년 추수가 끝난 11월에서 다음해 2월까지는 민가에서 낮에 열리는 가쿠라이고, 그 외에는 다카치호신사(사진 7)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밤에 여는 요가쿠라(夜神樂)이다. 이번 다카치호여행에서는 '신의 희롱'이라고 할 수 있는 요가쿠라를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특히 '다카치호에서의 한일문화교류'를 축하하기 위해 '호샤돈'(무용수, 사진 8)의 요가쿠라를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요가쿠라는 연주자들이 현장에서 부는 애절한 피리와 큰 북소리에 맞춰 진행된다. 전체는 33개 장면으로 구성돼 있고, 하루에 4장면씩 공연한다.
이 가운데는 이자나기, 이자나미 부부가 교합하는 에로틱한 춤(사진 9)이 등장하는데, 이 춤을 일본 '개국무용'(dance of Japan)이라고 부른다. '댄스 오브 재팬'은 특별한 기교가 들어있지는 않지만 술과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원시춤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 재미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보통 일본의 여자옷은 다 오른쪽으로 여미는데, 다카치호신사에 모셔진 여신의 옷섶은 우리나라처럼 왼쪽으로 여며져 있었다. 호샤돈이 요가쿠라를 공연할 때 여덟 방울로 된 요롱을 흔들고, 홍록종이를 오려서 창 끝에 달거나 흰 종이를 갈래갈래 찢어서 치마처럼 만들어 한편에 세워둔 모습이 우리 문화를 쏙 빼닮았다. 과거 고구려의 동맹이나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요롱을 영매체(靈媒體)로 썼고, 요즘도 무속인들은 요롱을 쓰지 않는가.
또한 다카치호마치에는 천상계의 신인 천조대신의 손자의 손자뻘쯤 되는 진무천황(현재 천황의 제일 윗대)이 지상계에 내려와 도읍을 정할 곳을 둘러봤다는 '구시후루'란 곳이 있는데, 바로 가야문화가 빛났던 경북 고령에 김수로왕이 내렸다는 구지봉과 꼭 같은 연원과 지명을 지니고 있어, 이곳에 가야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무천황이 살펴봤다는 전설의 땅이 바로 구니미가오카(國見ケ丘, 사진 10)로 해발 513㎞이다. 다카치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운해가 유명하다. 자연 속에 스며 있는 일본 신화와 전설을 전승하는 능력이 탁월한 다카치호는 깨끗하고 조용한 시골이지만, 빈집 하나 없으며 산꼭대기까지 농사를 짓는 '부러운' 시골이기도 하다.
글 사진 일본 다카치호에서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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