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장옥관 作 '다시 살구꽃 필 때'

다시 살구꽃 필 때

장옥관

옛 외갓집 살구나무 꽃 필 때

이모는 아궁이 속에서 굴러 나온

달을 품고 잠이 들었다

곤곤한 달빛 위로 흰 발목이 둥둥 떠다니며

장독마다 차오르는 물소리를

내 어린 풋잠은 엿들었던 것이니

그런 날이면 한밤중에도

오줌보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문풍지를 스미는 희미한 향기

먼 우주의 물고기가 안 마당까지 몰려와

하얗게 알을 슬어 놓고 가기도 하는 것인데

꽃잎 떨어진 자리마다 눈 맺혀

돋아나는 초승달

벌겋게 달아오른 외할머니의 아궁이가

한밤 내내 식을 줄 몰랐다

둥그스름 달집 딸아이의 몸속으로

벌건 숯불은 다시 지펴져

봄밤의 구들 뜨겁게 달구어낸다

살구꽃이 필 무렵, 양기(陽氣)가 온 천지에 흐르지요. 그 양기로 모성(母性)에 눈뜬 여성(이모)은 '달을 품고 잠들지'요. 실은, 잠든 것이 아니라 온몸이 '아궁이'되어 양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느덧 살구꽃이 졌다고 슬퍼하지 말아요. '꽃잎 떨어진 자리마다' 씨눈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살구꽃이 지는 것은 '꽃의 죽음'이 아닙니다. 생명 창조의 한 과정이지요. 마치 '외할머니의 아궁이'에서 이모가 태어나고 그 '이모'가 '딸아이의 몸속'에 '벌건 숯불'을 '다시 지피'듯이 말입니다.

인간의 죽음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열기 위한 장엄한 과정일 것입니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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