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자유를 향한, 그리고 위한…

검도에서 최고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을 일컬어 범사라고 한다. 기술도 뛰어나고 수련기간도 길어야 하지만 검도에 대한 나름의 자기철학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될 수 있는 입신의 경지를 일컫는다. 운 좋게도 내가 다니던 도장의 관장이 범사였는데 더욱 운이 좋은 것은 일본의 범사를 초청하여 시범대련을 가지는 행사에 참여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사범들의 시범대련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한, 일 범사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신선처럼 머리가 하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자 수백 명이 들어차 번잡하던 도장이 순식간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우리범사의 선공으로 1,2합이 이루어졌다. 거룩할 만큼 검도의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머리치기공격과 허리 베기를 시도하였다.

이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2차례의 공격을 나비처럼 가볍게 피한 일본범사가 갑자기 목검을 한손으로 들더니 마치 권투스텝을 발 듯이 앞뒤 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얼굴에는 해밝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순간 도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우리범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무슨 해괴한 자세인가?' '이건 검도의 기본이 아닌데...' ' 혹시 나이가 너무 많아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 아니가?' 하는 눈빛이 도장을 가득 메웠다. 0.1초도 안되는 그 짧은 당황의 순간 일본범사의 목검은 어느새 우리 범사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펜싱을 하듯이 한손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급소를 공격했다.

어이없는 탄식과 웃음소리가 나오면서 대련은 종료 되었다. 우리범사의 완벽한 패배였다. 일본범사는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검도철학을 이야기 했다. "기본기와 원칙은 완벽하게 자유로운 검의 사용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기본기를 위한 기본기, 원칙을 위한 원칙은 있을 수 없다. 싸움으로서 검도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고, 수련으로서 검도의 목적은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일본범사의 맑고 투명한 웃음과 강인한 눈동자, 그리고 단호한 말투를 잊을 수 없다.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아버지는 돈 버느라, 어머니는 살림 사느라 그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 다시 숨 한번 고르고 하늘 한번 쳐다보며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가 남에 뒤지지 않게 갖추려는 삶의 모든 기본기와 원칙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자. 그 순간마다 내 속의 자유의 나무는 아주 조금씩 자라기 시작할지도 모르니까.

황보진호 하늘북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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