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마다 비가 있지만 그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 비는 비로되 다른 비다.
빗소리 부터가 다르다. 봄비는 보슬보슬, 여름비는 주룩주룩,가을비는 부슬부슬,겨울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봄비는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단비,희망의 이미지다. 삭막한 풍경을 순식간에 화사하게 바꿔놓는 꽃비다. 여름비는 이 세상의 녹색이란 녹색은 다 모아놓은듯 끝간데없이 오묘한 녹(綠)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땅 깊은 곳의 샘마다 넘치도록 물을 채우지만, 때로는 들끓는 열정을 못이긴나머지 천둥·번개를 몰고와 온 산천을 할퀴며 상처를 내기도 한다.
가을비는 화려한 단풍과의 콘트라스트를 이루면서 '인생'을 바라보게 한다. 한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사람 마음을 처량하게 만드는 비다. 겨울비는 메마른 대지를 축이기 위해 가끔은 필요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불필요한 사족같다고나 할까.
이상하게도 모든 비는 과거회귀적이다. 그리운 사람을 더 그립게 만들고, 지나간 날들을 아련한 파스텔화로 채색한다. 그래선지 비오는 날, 사람들은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쓰고 싶어지고, 휴대폰 문자 메시지나마 날려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시 장마철이다. 봄비,가을비,겨울비와 달리 이 계절의 비는 달리 여름비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장맛비,장대비,소나기 등의 별칭은 갖고 있지만. 여름에 내리는 비라는 것이 가을 단풍처럼 너무도 당연한 까닭이다.
여름비는 괜시리 입을 심심하게 만드는 비다. 온 사위가 빗소리로 가득한 날엔 그저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주전부리 하고 싶게 만든다. 볶은 콩이나 금방 구운 애호박전, 매운 고추가 들어 눈물 쏙 빠지게 하는 부추전, 뉴 슈가 한 숟갈 넣어 분이 툭툭 터지도록 쪄낸 감자 같은 것들이 그리워진다.
여름비는 또한 잠비다. 또닥 또닥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달콤한 낮잠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여름비는 화가이기도 하다. 해거름 나절의 농촌에선 여름비가 그려내는 풍경화를 접할 수 있다. 예컨대 당(唐)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장마지는 망천장에서(積雨輞川莊作)'에 그려진 바'장마지는 빈 숲에 연기가 낮게 퍼지는(積雨空林煙火遲)'장면 같은 것을.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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