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단일화 60,70] 기인열전③

60년대 대구문단에는 전재수(田在洙·1940~1986) 시인이 있어 사건도 있었고 이야깃거리도 있었다. 그의 직선적이고 돌출적인 언행은 늘 문단의 폭풍이었다. 전재수는 변심한 첫사랑을 찾아가 공포탄을 발사했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에게는 가죽장갑을 끼고 결투를 신청할 만큼 격정적이었다.

경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김춘수 시인을 만나 시의 안목을 넓히고, 박목월 시인을 통해 '현대문학' 추천을 받은 전재수는 등단 11년 만인 76년에 첫 시집 '생활탄주'(生活彈奏)를 출간했다.

박목월 시인이 제자를, 김춘수 시인이 서문을, 권기호 시인(당시 문협 지부장)이 발문을 쓴 시집이다. 권기호 시인은 "이불이고 요가 전부 담뱃불로 '빵꾸'가 난 전재수 시인의 하숙집 방안 풍경이 눈에 선하다"며 '전재수는 방안으로 스며오는 연탄가스의 강한 무색의 현기증을 지니고 있다'로 시작했던 시집 발문 내용을 떠올렸다.

67년부터 6년간 대구 비행단에서 공군 정훈장교로 근무했던 그는 술을 좋아했고 저항적인 기질이 있어 더러는 술집에서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전재수는 체격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을 돌출시킨 격투용(?) 가죽장갑을 낀채 전의(戰意)를 불태웠고, 늦은밤 술집에서도 공군 라이방을 착용하고 앉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한번은 옛 아카데미극장 부근에 있었던 성림다방에 흑장갑을 낀 양손을 탁탁 부딪치면서 나타난 그가 "오늘 내가 대구문단에서 몇 놈 손볼 놈들이 있는데..."라며 공포심을 조장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예종숙 시인의 얼굴이 웬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시 문협 지부장 선거를 둘러싼 문인들간의 불협화음 때문이었다.

그가 옥이집에서 조기섭 시인과 벌인 혈투는 대구문단에서도 손꼽히는 일대사건이다. 그러나 전재수는 누구 못지않은 섬세한 시인의 감정도 지니고 있었다. 권기호 시인의 말처럼 '근본은 소박하고 순한 사람'이었다. 전재수의 하숙방에 잉꼬나 카나리아 같은 새가 있었는데, 문우들이 "웬 새냐"고 물으면 "새소리가 좋아서 키우지, 지도 울고, 나도 울고..."라는 대답을 툭 던졌다.

술에 취하면 집 앞 계단에 드러누워 자곤 하던 전재수는 추운 겨울 어느날 결국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한 후배 시인이 그를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어찌 부름 없이 갔으랴/ 먼저 간 그대/ 벽제고개 한 평의 땅에/ 오늘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한잔 술이 오르면/ 간단 말없이 훌쩍/ 자리를 뜨던 그대/ 그 버릇 한 번 크게 했구려//...// 어둠도 눈물도 없는/ 세월도 아픔도 없는 거기/ 먼저 간 그대'.

이재행(李在行·1946~1996) 시인처럼 대구문단에 숱한 화제를 남기고 떠난 사람도 드물다. 이재행은 대구문단에서 손꼽히는 기인이었던 박훈산 시인의 데카당적인 행보를 고스란히 계승한 것 같은 인물이었다.

어떤 문인이 다소 기인적인 면모라도 보일라치면 "제2의 이재행이 나왔구나"라고 그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였다. 그만큼 이재행은 대구문단의 '악동'으로 통했다. 외상술 마시기와 빌린 돈 안갚기는 단골 메뉴였다.

술마시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거짓말을 일삼았고, 선후배 문인 집에서 책을 빌려(?)가서는 고서점에 팔아 술값으로 써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권기호 시인의 시를 표절해 문예콩쿨상까지 받았는가 하면, 평소 자신을 막내 동생처럼 여기던 조기섭 시인의 여제자와 스캔들을 일으켜 선배 시인을 곤란한 지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76년경 문협 시화전이 열렸을 때였다. 당시 시화전 프로그램을 판매한 수익금을 이재행 시인이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 가버렸는데, 주최측에서 이를 나무라자 화가 나서 자신의 출품작을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기도 했다.

옆구리에 늘 1호 봉투든 책봉투든 무엇을 야무지게 끼고는 말만큼 빠른 걸음으로 종횡무진 다녔던 그에게 당한 문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70년대 경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해수 시인은 당시 권위있는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의 편집장이라고 거짓 전화를 한 이재행에게 속아 경주의 일류 요리집 요석궁에서 석달치 봉급을 털리기도 했다.

현대문학에 시가 실릴 것이란 기대를 안고 요석궁을 찾았다가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재행은 친구가 몰고 온 개를 잡혀놓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데 주인의 배신에 상심한 개의 슬픈 표정이 문학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바람에 술잔은 자꾸만 늘어갔다.

그러다 귀가길 통금에 걸리면 중앙통 거리를 엉금엉금 기면서 "나는 개다"라며 다시 견공(犬公)을 팔았다. 이재행은 이렇게 낭만적인 기행이라기 보다는 특유의 반항적 기질을 많이 보여 문단에 좋지 못한 평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재행은 미워할 수 없는 문단의 저지레꾼이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위트와 유머가 있는 매력있는 문인이었으며,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문단의 악동이었다. 문인이 그리 많지 않았던 그 시대는 그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었다.

이재행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그를 늘 따뜻하게 보살폈던 조기섭 시인은 "현실인으로는 파멸적인 행적을 남겼지만,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런 데카당적인 삶도 가능하다고 본다"며 포용하는 입장을 밝혔다.

대구문단에서 소설가 김정환(金正煥·1937~?)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는 드라마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홀연히 사라진 작가이다. 65년 매일문학상으로 등단하던 해 첫 창작집 '이 엄청난 역설'을 출간했던 김정환은 73년 어느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대구상고 재학시절 소설가 최고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럭비선수 출신으로 대구문단에서 '한주먹'을 자랑했던 그는 술자리에서 향촌동 주먹들을 때려눕힐 만큼 완력도 있었다. 옆에 있던 정석모 시인과 작가 윤장근이 놀랄 정도였다.

주로 뒷골목의 질펀한 이야기들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던 그는 사라지기 3~4개월 전 술에 취해 귀가하다 통금에 걸리자 경찰관의 멱살을 잡고 "나는 보통 술꾼이 아니야. 고려자기와 사이다병도 구별 못해?"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엄청난 역설!. 그는 자신의 소설같은 삶을 살다가 소설 제목처럼 사라져버렸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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