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도를 가다] 국가 눈감아도 민초는 팔걷었다

독도는 이름만큼이나 외로운 땅이었다. 해양 영토에 대한 관념이 부족했던 1950, 60년대까지만 해도 독도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부족했다. 특히 1965년 6월 14년간이나 끌어오던 한·일 기본조약이 맺어진 뒤부터는 독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왔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일협정을 맺는 것에 급급해 청구권, 어업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 여러 가지 조항을 대폭 양보했고, 당시 쿠데타 세력의 실세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독도 문제로 협정이 지연되자 '독도를 폭파해버리자'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이후 독도는 우리 땅이면서도 우리 땅이라고 내놓고 부를 수 없는 곳이었지만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독도는 우리 땅

지난 1999년 12월 일본인 6가구 7명이 독도로 호적를 이전한 사실이 확인됐다. 줄기차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해 온 일본이 공식적으로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정부는 원론적인 비난 성명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독도를 사랑하는 많은 국민들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독도 본적 옮기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2006년 6월 말 현재 591가구 1천975명이 독도로 본적을 옮긴 것. 이들은 해마다 각종 독도사랑 행사를 마련해 제2의 고향이자 국토의 막내인 독도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과거부터 정부보다는 국민들이 먼저 나서 우리 땅을 지켜온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증거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서기 512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 이래 법흥왕, 진흥왕대까지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자 신라 왕실의 중신인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울릉도와 독도)이 신라에 속했다."고 적혀 있다. 당시 이사부는 '우산국은 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주민들이 사나워 힘으로는 정복할 수 없어 나무로 만든 사자를 전함에 싣고와 위협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죽이겠다는 계책으로 마침내 신라에 복속'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는 본토와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정부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세종실록지리지(1432, 1454년 편찬)에 '우산, 무릉 두 섬은 울진 현 동쪽 바다 한가운데 있다. 두 섬은 멀지 않아 서로 왕래할 수 있으며,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 불렀으며, 울릉도라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 고려사 울릉도 편과 신증동국여지승람도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어부였던 안용복은 부산 동래의 어부였지만 조정이 방치하고 있던 독도와 울릉도를 적극 경영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1693년 10여 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한 안용복은 독도와 울릉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영토 침범을 문책했다. 이어 그는 '무릉·우산 양도 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에 건너가 시마네현 태수로부터 일본어민들의 국경 인근 출어금지 공한을 받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켰다.

안용복은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죄인이나 부역 기피자들이 섬으로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5세기 초부터 조선 조정이 실시한 섬을 비우는 정책)을 어기고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안용복의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 에도막부는 1697년 대마도주를 시켜 일본어민들의 울릉도와 독도 출입을 자진 금지한다는 공문을 부산 동래부에 보내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고유영토임을 조선정부에 통보했다.

◆독도를 지킨 마지막 의병들

홍순칠(洪淳七·1987년 작고)과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는 이 땅의 마지막 의병이라고 불린다. 1950년 6·25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인들이 독도에 침입했다. 이들은 1948년 독도 근해에서 발생한 미군기 폭격사건으로 숨진 울릉 어민들을 위해 세웠던 위령비를 뽑아내고 일본 영토 표시 팻말을 세웠고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은 출어 중이던 우리 어선의 작업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 때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홍순칠, 김병렬 등 젊고 혈기왕성한 울릉지역 출신 전역병들이 일본의 만행소식에 분개해 '독도사수 특수 의용대(의용수비대 명칭으로 통일)'를 조직했다. 당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생존해 있는 정원도(77·울릉) 씨는 "1953년 4월 20일 울릉도에서 옮겨간 목재로 동료들과 5개월 동안 10여 평의 초소 1동을 지었다."며 "현재 경비대 막사로 올라가는 계단도 당시 구르는 돌을 맞아가며 함께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울릉경찰서 등이 마련한 박격포 1문과 포탄 200발, 직사포 1문과 포탄 30발, 중기관총, 경기관총, M1소총 20정 등 장비와 실탄 2만 4천 발을 지원받아 무보수로 독도 경비에 나섰다. 수비대는 1953년 6월 일본 오키 수산고 연습선이 독도에 침범한 것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후 귀항조치했다. 이해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함 해구라호가 침범하자 위협사격으로 격퇴시켰으며 8월 5일에는 대한민국 영토비를 건립했다. 이후 우리 정부는 1954년 8월 15일에 독도에 무인등대를 점등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 침략은 노골적으로 늘어나 의용수비대는 1954년 순시함 오키호를 격퇴시켰고, 1955년 초에는 PS 9, PS 11, PS 16 등 보안청 순시함 3척과 비행기 1대가 침범한 것을 총격전 끝에 물리치는 등 수차례에 걸쳐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며 독도를 사수했다.

유원식(77·당시 교육대장·울릉) 씨는 당시 "독도에는 상단부 쪽으로 올라다니는 길이 없어 한 대원이 돌산을 기어올라 60m의 줄사다리를 늘어뜨리면 나머지 대원들이 그것을 타고 오르내렸고 식량이 떨어져 3, 4일씩 굶는 것은 예사였다."고 기억했다.

◆남은 사람들의 몫-독도지키기

독도 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25일 경북경찰청 울릉경찰서에 독도수비권을 이양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갔다.

해산 당시 수비대의 조직은 대장 홍순칠, 부대장 황영문, 제1전투대장 서기종(생존·울산), 교육대장 유원식(생존·울릉), 보급주임 김인갑, 보급보좌 구용복, 선장 정이관, 기관장 안학률, 갑판장 이필영(생존·울릉), 정현권, 대원 김재두 최부업(생존·포항) 조상달 김수봉 하자진(생존·포항) 김현수 이형우 김장호 양봉준 정원도(생존·울릉) 김영복(생존·포항) 김영풍 이상국 이규현(생존·울릉) 김경호(생존·경주) 허신도 김영호 김병열 정재덕 한상용 박영희(생존·구리) 오일환(생존·부산) 고성달 등이었다.

1966년 4월 정부는 홍 대장에게 공로훈장을, 정원도 씨 등 대원 8명에게는 방위포장을 수여했다. 그 뒤 일본정부가 다시 독도영유권 문제를 들고 나오던 1996년 4월 정부는 이미 1987년 고인이 된 홍 대장에게는 보국훈장 광복장, 나머지 32명의 대원 전원에게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많은 대원이 이미 고인이 됐고 현재 생존자 11명도 팔순의 나이로 대부분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수비대가 아무런 보상없이 치른 민간차원의 호국의지는 '이 시대 마지막 의병 정신'이었으며, 오늘날 범국민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독도지키기 운동으로 연결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울릉·허영국기자 huhy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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