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미 FTA 파고] ①

세계의 곡창 캘리포니아

어떤 이는 '제2의 개항'이라고 한다. 다른 이는 '쌀 협상이 소나기였다면 이번은 쓰나미'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일컫는 말들이다.

한·미 FTA 체결로 가장 큰 타격을 볼 것으로 예측되는 농업분야는 10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2차 협상에서도 뜨거운 쟁점이 될 전망이다. 특히 경북은 농산물 중에서도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는 과수·축산분야 비중이 높아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농업의 실태와 앞으로 협상에서의 쟁점, 대응방안 등을 살펴본다.

미국 내 최대 농업생산지인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건조하다. 1년 중 11~2월, 4개월이 우기이고 나머지 기간은 비가 거의 오지않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2시간 거리인 살리나스 밸리(Salinas Valley)의 드넓은 벌판에도 초여름 따가운 햇살이 가득하다. '샐러드 볼'(Salad bowl)이라고도 불리는 살리나스 밸리는 미국 내 채소생산의 중심지. 상추는 80%, 과일채소는 50%를 담당하고 있다.

살리나스 밸리는 한여름에도 선선한 해양성 기후 덕분에 연중 내내 채소재배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멕시코계 일용인부들의 피땀이 서려있다. 취재진이 찾았던 6월초에도 멕시코계로 보이는 남녀 인부 20여명이 트랙터를 이용, 분주히 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1930년대 농장주의 착취에 시달리는 소작농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무대에서 지금은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이 시간당 8달러라는 헐값에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 LA지사 신장현(45) 부장은 "멕시코계 일용인부가 없으면 미국농업이 마비될 것이란 지적이 나올 정도"라며 "북미자유협정(NAFTA) 이후 멕시코 농업이 피폐해지면서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멕시코 유민이 넘쳐나는 이 땅의 이름이 NAFTA를 추진했다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카를로스 살리나스(Carlos Salinas) 전 멕시코 대통령의 이름과 똑같은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코스트산맥(Coast Ranges)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있는 101번 고속도로를 벗어나 46번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시속 80km로 3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포도밭이 이어진다. 언뜻 잘 깎아놓은 잔디밭처럼 보이는 착시현상마저 빚어진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유명 와인산지인 '나파 밸리'의 포도밭이 차라리 소박한 우리 농촌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 곳은 SF영화에나 나올 법 하다.

경북도 농업기술원 최성용(50·과수원예학) 박사는 "산 후아킨 밸리(San Joaquin Valley)는 미국에서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라며 "포도나무 수령이 3, 4년에 불과한 점으로 미뤄 2003년 광우병 파동 이후 초지를 포도밭으로 바꾸고 있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 많은 포도가 'FTA 물결'을 타고 국내로 쏟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아찔해지는 순간 이젠 거대한 '숲'이 시야에 꽉 들어찬다. 체리와 아몬드 과수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함에 한 번 놀라고, 수백ha의 땅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둑판처럼 심어놓은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모두 위성항법시스템(GPS)을 활용한 덕분이다.

흔히들 미국 농업의 경쟁력으로 넓은 평야와 알맞은 기후, 자본과 농업기술의 발달, 대규모화·기계화를 꼽는다. 캘리포니아만 해도 농가 호당 경지규모가 약 122ha로 우리나라 호당 경지면적 1.5ha에 비해 82배나 된다. 이에 따라 이미 가격 경쟁력에선 국내산에 비해 콩은 11배, 쌀은 4.5배, 쇠고기는 3.6배 정도 차이가 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FTA 체결로 관세장벽이 허물어지면 월등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미국산 농산물 수입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미 FTA체결로 국내농업 GDP는 1조 1천500억~2조 2천800억 원 감소하고 농산물 수입은 1조 8천300억~3조 1천700억 원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큰 폭의 수입증가가 예상되는 품목만 30여 종류에 이르고 아직 국내 수입이 금지돼 있는 신선 사과·배·복숭아·딸기도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될 지 모른다. 관세가 철폐될 경우 국내산에 대비한 수입가격은 사과 25%, 복숭아 36%, 쇠고기 45%라는 전망치도 나와있다.

대구·경북이 주산지인 국내 과일시장은 아쉽게도 이미 상당 부분 수입과실에 잠식된 상태다. 50%의 관세를 물고도 국내시장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미국산 오렌지, 칠레산 포도, 뉴질랜드산 키위 등에 밀려 국내산은 차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소비자의 입맛이 외국산에 길들여지면서 대표 과일인 사과도 소비량이 급감하고 있다. 국산 농산물과 직간접적 경합이 예상되는 품목을 지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이 절실한 대목이다.

대구경북연구원 이상호(32·농경제학) 박사는 "고추, 마늘같은 품목은 과일, 축산 등에 비해 관심이 적은 편이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초지에서 탈바꿈한 살리나스의 포도밭은 시장상황이 좋아지면 언제든지 마늘밭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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