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월드컵이 남긴 것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던 2006 독일 월드컵 축구경기도 이제 결승전을 남겨두고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드컵 축구열기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었다.

그때 내가 거리응원단을 찾은 것은 우리 선수를 응원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수십 만 수백 만 응원단이 강제 동원도 아닌 제 발로 그것도 밤새 한자리에 모여 열광적인 응원전을 펼치는지 그 현장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심리를 가장 자극하는 붉은 유니폼은 멀리서 보아도 하나라는 공동체를 말하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선 거리 응원단을 보고 월드컵 초에 크게 유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꼭짓점 댄스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 게 우선 뜻밖이었다.

핸드마이크 소리와 북소리에 맞춘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너무나 선명하고 큰 화면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우렁찬 구호 속에 있으면 누구나 들뜬 가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같은 뜻으로 한데 모였다는 것 만으로도 "집에서 TV를 보며 응원해도 되는데 왜 여기까지 나왔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20대 전후의 젊은이들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일꾼들이다. 누가 그들에게 버릇이 없다고, 책임감이 없다고, 미래가 없는 젊은이들이라고 혹평했던가? 한순간 우리나라의 미래는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충일 날 아파트에 홀로 걸려있는 태극기를 보고 한숨짓던 내가 그곳에 가서 수많은 태극기의 물결을 보고 감격한 것이었다. 야외 응원전 현장은 갖가지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태극기로 앞가슴을 보일듯 말듯 반쯤 가리고, 배꼽티에다 팬티에 가까운 반바지를 입고,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펼치는 S라인의 젊은 율동은 시선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다소 지나친 노출도 그곳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골이 터지거나 슛을 날릴 때 일어나던 그 함성과 열광. 이미 내가 선수가 되어 있었고, 화면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동심일체가 되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처음 보는 남녀가 부둥켜안고 뛰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축구 응원전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카니발의 분위기였다. 승패를 떠나 길거리 응원 그 자체가 즐거웠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길거리 응원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그 위력을 재확인했다.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젊은이들의 연호를 보면서 입시에 찌들린 청소년과, 졸업을 해도 갈 곳이 없는 대학생들을 잠시 떠올렸다.

답답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거리응원 문화가 활력소가 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강요와 구속에 길들여진 그들에게는 애초에 집단으로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건전한 놀이문화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우리 한국축구가 16강에 8강에 들지 못했는가? 원망스러웠다. 그랬다면 거리의 응원은 한층 신명이 났을 것이고, 월드컵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환희에 젖어들며, 고단한 삶에 지친 서민들의 애환을 한 방에 날려보내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인데….

16강전에 좌절한 태극전사들은 곧바로 귀국했고 도착하자마자 팀을 해산했다. 독일까지 가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붉은 악마들의 조직적인 응원과 수백만의 거리 응원단들도 그림자같이 흩어졌다. 그 열광과 함성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승부의 세계는 너무나 냉혹하다. 월드컵만큼 승자와 패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골을 넣은 승자는 열락의 세리머니를 연출하고, 패자는 반대로 허탈과 실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이것이 비단 축구뿐이겠는가. 인간사 모두가 그럴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일희일비하는 게 세상사이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4년 후 월드컵은 다시 열릴 것이고, 우리는 다시 뛸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새겨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한 패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성숙한 의식이다. 향토출신 축구 대표선수 박주영이 "나는 승패에 연연하기보다는 단지 축구가 좋아서 축구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송일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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